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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1 에세이

시대를 관통한 도시의 해장법

2021.05.30 | 미식탐정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매일 먹고 또 매일 마신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마시고 기쁜 일이 있어도 마신다. 마실 이유는 많지만 해장할 당위는 하나로 귀결된다. 해장국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해장국집인 청진옥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숙취에 힘들어하는 시민에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준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 청진옥 : 서울 종로구 종로3길 32 매일 00:00~24:00

그런 날이 있다.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날에는 해장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먹어도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지독한 숙취가 따라다닌다.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향하는 곳은 해장국집이다. 이제는 피자, 햄버거 해장도 보편화됐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해장국을 이기는 해장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장국은 해정(解酲)이라는 말에서 왔다. 숙취를 해결하는 국이다. 뜻을 풀자면 거창하지만 맛은 어떤 국보다 명료하다. 얼큰함보다는 시원함이 앞서고 시원함은 깊이를 겸비한다.


2017년 여름의 일이다. 더위가 정점에 있는 금요일이었다. 사무실 안 공기는 건조했는데 체내에 차마 소화되지 못한 소주의 향이 공기를 떠다녔다. 숙취가 두뇌를 떠나지 않을 것처럼 괴로운 날이었다. 에어컨 바람은 형식적인 기계 바람을 내뿜으면서 머리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같이 숙취에 허덕이던 회사 선배는 거의 실신 상태로 사무실 의자에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이고 몸을 위탁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신음 소리로 서로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열꽃이 얼굴 곳곳에 피고 사지는 생기 없이 늘어졌다. 열한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서로 눈치를 보다 선배는 앉아 있는 나에게 눈짓을 하며 신호를 보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눈치였다. 탄산수를 몇 모금 먹는 척을 하다 두 주취자는 사옥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술에 절은 몸을 이끌고 청진옥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유난히 멀었다. 아스팔트의 복사열이 연신 용암처럼 열기를 내뿜고 티셔츠는 땀에 젖었다. 힘들게 도착한 해장국집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있는 전투 병사처럼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취객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방에는 창업 이래 불이 꺼지지 않았던 솥에서 육수가 끓고 있다. 취객들에게는 이 육수가 성수처럼 성스러운 존재다. 신맛이 강하지 않은 심심한 맛의 깍두기를 먼저 먹고 있자니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뚝배기가 식탁 위에 나왔다. 어렵게 마주한 뚝배기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 청진옥

치장하지 않은 올바른 맛

두 사내는 말없이 육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첫술에는 밋밋한데 노포의 국물에는 맛이 차곡차곡 혀에 쌓이는 성질이 있다. 배추의 시원함이 짙게 깔리고 소 내장이 가진 원초적인 고기의 기운이 몸에 감겼다. 시원함의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반쯤은 그냥 먹다 나머지 반은 파를 듬뿍 넣고 먹으면 육수에 청량감이 생긴다. 국밥과 허겁지겁 먹는 자아에는 피아의 구분이 없다. 몸의 알코올은 해장을 위해 만들어진 진액과 갈음하는 과정에 있었다. 얼굴 곳곳에 핀 열꽃은 어느새 혈색을 찾아가고 등은 술인지 땀인지 구분하기 힘든 액체로 흥건하게 젖었다.


한국에는 지역별로 여러 스타일의 해장국이 있지만, 청진옥은 오랜 업력으로 이미 존재 자체가 대명사화됐다. 구수한 양 선지 해장국이다. 정수는 선지에 있다. 잡내가 없고 차진 식감 뒤로 녹진한 피맛이 몸으로 들어온다. 입에 감기는 탱글탱글한 내장의 식감과 대조되면서 시너지가 난다. 진국이라는 말이 있다. 국물의 진함을 뜻하는데 진국은 치장을 하거나 재료 본연의 음성을 가리지 않는다. 단출하지만 올바른 맛이 난다.


2018년 청진옥 본점은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예전 청진옥의 정취는 사진으로만 확인을 할 수 있다. 피맛골에서 재개발로 르메이에르 빌딩으로 한 번 이전을 하고, 지금의 사옥으로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해장국으로 일가를 이룬 집답게 웅장한 건물 전체에 술기운이 서려 있다. 주당의 아우라가 가득한 건물 속에서 해장국 뚝배기를 비운 사람들은 슬슬 현실 세계로 복귀한다. 더디게 흐르던 시간은 어느새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면 숙취의 상흔을 잊은 채 다시 술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글.사진 미식탐정
동네마다의 숨겨진, 혹은 알려졌으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 식당들을 찾아갑니다.
blog.naver.com/tastesher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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