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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2 에세이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종류의 결핍을 주고 싶어

2021.06.07 | 아이였던 너에게

네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을 때 한 번씩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면 너는 ‘왜에?’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흐헤헤 웃으며 걸어와 품에 쏘옥 안기지. 세상에 온 지 두 해가 안 된 너. 15킬로그램도 안 되는 너를 안을 때 어쩜 이렇게 작을까 매번 놀라면서도 따스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체온이 닿는 게 좋아서 버둥거릴 때까지 힘줘 있게 돼. ‘사랑아~’ 안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너를 부른다. 가족으로 유일하게 선택한 사람과 사랑해서 너를 초대했고 부모가 된 후 이 정도로 솟아나는 줄 몰랐던 사랑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 별명은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네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과 종종 날씨 이야기를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아. 비슷한 시기에 엄마가 된 이들의 집에 초대받아서 구경할 기회가 종종 생기기도 하지. 어떤 집에 갔더니 방 하나는 아이 책으로 꽉 채웠고, 그러고도 둘 자리가 없어서 거실 소파 위에도 책을 켜켜이 쌓아두었더라. 영어로 된 음악이 하루 종일 틀어져 있는 집도 있었고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걸을 때마다 발에 치이는 경우도 봤어. 그런 엄마들이 우리 집에 오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아이 물건이 별로 없다는 거였어. 아이 책도 적고 아이 옷도 적고 아이 장난감도 적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아. 아이들의 창의력은 심심함에서 나오고 이 시기엔 몸으로 놀아주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는 생각이 있거든. 게다가 공부는 기본적으로 재능에 따른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여기까지만 들으면 엄마가 사교육 반대론자 같으려나.

엄마의 관심사는 너의 예술 감각과 취향을 자연스럽게 훈련시키는 쪽으로만 집중돼 있어. 일단 피아노는 기본이고 바이올린 같은 악기 연주를 두 개 이상 하길 바란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으면 좋겠으니 미술학원에도 꾸준히 보낼 것이고, 주기적으로 전시회에 함께 가고 공연장에 가고 특히 국내외 여행을 매년 빠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왜 이쪽으로만 결심하고 알아보나 생각해보니까 사실 네가 가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는 것들이 다 엄마에게 없어서 부끄럽다고 느꼈던 것들이더라.


누구 앞에서든 잘 긴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창피를 느낀다고 하니 좀 의아하려나? 가난한 가정에서 독립적으로 자랐고 성취 지향적인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하면 (비슷하게라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야. 공부를 잘해서 선망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사업 수완이 좋거나 부자인 이들을 볼 때는 그다지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자연히 주눅 들지도 않지. 그런데 그림이나 음악 같은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 외교관인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살다 오는 식으로 어릴 때부터 문화적 수혜를 받았거나 확고한 취향이 있는 사람을 보면 쪼그라들어. 그런 사람들은 마치 혈통부터 다른 귀족처럼 느껴지는 거야. 다른 건 노력해서 따라잡을 수 있겠는데 축적된 안목을 가진 사람 앞에선 어떻게 하더라도 간극을 메울 수 없겠다는 걸 느끼는 데서 오는 압도됨이지.

그 때문에 너에게는 꼭 예술을 일찍이 생활에서 접하게 하고 어울리는 패션 스타일을 알게 하고 국립미술관이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같은 곳이 스타벅스에 가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되게끔 하고 싶은 거야. 그러고 보면 결국 부모는 자식에게 한풀이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엄마의 아빠인 너의 대구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줄게. 대구 할아버지는 외아들이었는데 하루에 한 끼라도 먹는 날은 운이 좋은 거였대. 자연히 고등학교도 못 갔는데 그 때문에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됐고 오래 방황했다지. 대구 할아버지가 생각한 부모의 도리란 자식을 굶기지 않고 최소한 고등학교는 보내는 거였어. 그것만 해도 좋은 부모이고 충분하다고 여겼지.

[unsplash]

어릴 때 엄마는 그런 너의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어. 엄마가 생각하기엔 최소한의 의무로 보이는 것들이 너희 대구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겐 최대한의 시혜인 거야. 엄마가 무슨 말을 하면 ‘밥 굶는 사람도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한다.’는 이야길 듣곤 했어. 서로가 생각하는 부모 도리에 대한 간극이 컸으니 자주 다툴 수밖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본인들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서 자식을 대했고, 나는 또래 친구들과 비교해서 처지를 바라봤으니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 거야. 그래도 어쨌거나 너의 대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채소 장사를 하고 버스 운전을 하거나 공장에 다니면서 자식 셋을 굶기지 않았고 고등학교 이상씩은 보내준 것도 사실이다. 동네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가는데 자신들은 그럴 수 없으니 창피해서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도망 다녔다는 한은 최소한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았어.

엄마는 그 덕에 그때 부모님이 느끼셨을 기분은 영원히 모를 수 있게 되었지. 한편 할머니 할아버지 또한 영원히 엄마의 결핍을 모르실 거야. 못 먹고 못 배운 결핍은 없는 대신 문화적 자본에 관한 콤플렉스가 있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든다는 것을. 예컨대 엄마는 명품 가방이 많은 사람은 하나도 부럽지 않아. 관심이 없는 것뿐 사려면 살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말을 하는 부류 있잖아. “이 가방은 할머니가 물려주신 건데요, 저 가방은 엄마가 쓰시던 건데요, 이 가방은 성년의 날 기념으로 아빠가 사주신 건데요.” 같은 말을 하는. 그런 이를 보면 멈칫하게 돼. 너를 외동으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원리 같아. 주변에서는 외동으로 자라면 외로워서 힘들다고 하는데 엄마는 그런 류의 외로움에 대해 전혀 모른다.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할 수 없으니 너에게 줘도 미안하지 않아. 그게 어떤 거라도 엄마가 어릴 때 항상 언니와 동생에게 양보했던 괴로움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아는 슬픔은 과대평가하고 모르는 슬픔은 과소평가하잖아.

결국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니까 자기가 잘 아는 종류의 결핍만은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은 부모가 모르는 종류의 결핍을 떠안게 되는 거야. 인간의 결핍이란 어느 한군데가 넘치면 다른 한군데가 비는 식으로 반드시 총량을 맞추게 되어 있으니까. 그처럼 자기가 모르는 결핍을 전달하는 것이 대를 건너뛰어 물림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돼. 외동으로 자라게 될 너는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외로움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둘 이상은 낳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겠지.

간절히 원했던 성장 배경을 연극 무대처럼 이리저리 꾸며보며 너에게 선물하려는 자신을 보며 상상할 때가 있어. 커서 너는 엄마에게 실은 어떤 게 결핍이었다고 고백하게 될까? 그 어둠이 어떤 종류일까 아무리 떠올려봐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게 무엇이든 판단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너는 나에 비해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쓸 거야. 어른들이 할 일은 최소한 잘 아는 결핍은 전달하지 않는 것이며 그로 인해 또 다른 결핍을 갖게 된 아이들에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뿐이니까. 세상에 먼저 와 있던 선배로서 최대한 내가 잘 아는 기쁨만을 너에게 가득 줄게. 그 때문에 생기는 부산물은 어쩔 수 없겠지만. 모두 이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영원히 모르고 있을 너를 언제나 기다리고 지켜보며 응원한다.


글. 정문정
일러스트. 조예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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