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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4 에세이

위로를 주는 음식

2021.07.18

토요일 아침이다. 일찍 일어났다. 연일 고단하다. 식구들은 아직 잔다. 배가고프지도 않은데 밥을 먹기로 했다. 여느 날처럼 접시 하나에 반찬을 대강 담으려다가 선반 높은 곳에 올려둔 반상기를 꺼냈다. 결혼할 때 엄마가 주신 건데 좀처럼 쓰지 않아서 새것 같다. 냉장고에 있던 미역국을 데우고, 밀폐 용기에 담아둔 고사리나물을 다시 볶아서, 백자 그릇에 담았다. 내 밥상을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본 적이 있었던가? 오늘은 밥도 천천히 먹을 거다.

고사리
일곱 살 땐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숙모는 큰 시누이의 아이에게 좋은 반찬을 해 먹이고 싶었나 보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니?” 그런 질문은 생전 처음 받아봤다. 나의 선호를 물어봐준 사람도 없었고, 세상에 무슨 음식이 있는지도 잘 몰랐다. “…고사리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나도 그때 알았다. 숙모가 살짝 웃었다. 저녁상에 불고기와 함께 고사리나물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도 말린 고사리를 살 수 있다. 런던에 있는 한국 슈퍼마켓에서는 말린 고사리뿐만 아니라 곤드레, 취나물, 가지, 호박, 무시래기, 토란대 등 각종 말린 나물을 판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사나흘이면 온다. 보통, 마른 것들은 생기(生氣)가 없다. 마른 꽃, 마른 풀, 마른 밥, 마른 빵, 마른 입술 같은 것들이 그렇다. 수분, 빛깔, 생명 등 사라져버린 것의 빈자리만 보인다. 그런데 마른 나물은 다르다. 빠져나간 것의 자리를 다른 것들이 꽉 채우고 있다. 햇살, 수고, 기다림, 부활의 희망까지. 먹고 나면 힘이 솟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일전에 함경남도 청진에서 온 최 선생을 리치먼드 파크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일찍 와서 자리 잡고 기다리던 최 선생이 말했다. “와, 저기 뒤에는 고사리가 잔뜩 있네요.” 고사리라니, 런던 최대의 왕립공원과 고사리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다. “이런 데 고사리가 있어요? 어떤 거예요?” “고사리를 모르세요?” 최 선생은 어떻게 고사리를 모르냐는 얼굴로 반문했다. 나는 누군가 손질해 매대에 올려놓은 고사리밖에는 본 적이 없었다. 세상 편하게 살았다. 야생 고사리도, 그걸 뜯고 말린 사람도 모른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미역국
큰아이를 낳고 나서 미역국을 삼시세끼 한 달 동안 먹었다. 엄마는 소고기 양지를 푹 삶아서 날마다 국을 끓여주셨다. 의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산모라도 미역국은 하루에 반 그릇이면 충분하고 그 이상은 요오드 과다 섭취로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하는데, 과학이 전통을 이기지 못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산모에게 미역국은 음식을 넘어, 심신의 보약이고, 가족의 돌봄이고. 엄마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이다.

둘째 린아를 낳을 때는 영국에 있었다. 곁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미역국은 내가 끓였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갈 때 미역국에 밥을 말아 밀폐 용기에 담아 가져갔다. 출산 후 첫 끼는 그걸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힘들고 긴 하루가 지나 아이가 태어났고, 밤이 되었다. 가족은 함께 있을 수가 없어서 남편은 돌아갔다. 아기는 엄마가 데리고 잔다. 고단한 아기는 쌕쌕거리며 잘 잤다. 가방을 뒤져 미역국을 담아 온 용기를 꺼냈다. 국은 차갑고 밥알은 불어 있었다. 씹지도 않고 넘겼다. 목이 멨다. 그때는, 오늘 세상에 나온 아기만큼이나 나도 이곳이 낯설었다. 아이는 두렵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병원에서 먹은 미역국은 오랫동안 슬픈 기억이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 분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때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보낸 소포를 왜 잊고 있었을까? 출산을 앞두고 커다란, 그러나 가벼운, 소포가 한국에서 왔다. 미역을 한가득 담고서.


글 | 사진.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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