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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2 컬쳐

여기가 아닌 어딘가, 문화역서울284

2021.11.30 | 도시에 숨다

삶의 권태를 이겨내는 여행만 것이 있을까. 낯선 풍경 속으로 스며들어 본래 있던 자리를 까맣게 지웠다가, 어느 다시 그리워하기를 반복하는 . 사실, 이토록 떠날 생각에 잠긴 이유는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돌아오고 싶어지기 위함에 있다.

여행이 그리워서
요즘에는 떠나는 꿈만 꾼다. 이국적이고 생소한 공간의 경험도 간절하지만,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여행을 기다리던 나날의 설렘이다. 6개월 무이자 할부로 비행기표를 덜컥 결제해버리고, 숙박 예약 사이트를 오가며 어디에 묵을지 고민하는 일. 근무 중 틈이 날 때마다 블로그를 기웃거리며 이미 다녀온 이들의 경험담을 살피는 일. 먹어보고 싶은 음식, 가보고 싶은 가게를 메모해두는 일. 그런 순간의 생기가 그립다.

사는 게 치사해도, 사람이 얄미워도 ‘얼마 후면 떠날 거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 새어나오던 미소. 떠나는 날의 새벽, 얼마간의 일을 미리 해두느라 피곤한 몸으로 공항버스에 올라탈 때의 가뿐함. 공항에 들어선 순간의 긴장감, 턱이 살짝 간질거리는 정도의 떨림, 넉넉해지는 마음이 간절하다. 믿을 만한 치트 키 하나를 얻은 듯 가슴속에 여행을 품고 지내던 그런 날들이 언제 다시 오려나. 오긴 오려나.

나의 첫 기차 여행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떠났던 경주였다. 서울역이 아직 르네상스풍의 건물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새마을호가 가장 빠른 기차이던 시절의 기억이다. 여행의 과정은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는데, 몇몇 풍경이 정지 화면처럼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기억조차 동영상이 아닌 사진의 형태인 걸 보니, 나란 인간의 구조 자체가 옛 방식인 걸까 싶어진다.

이상하지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서울역의 천장이다. 역에 처음 들어섰을 때 엄청나게 높아 보이던 아치형의 천장에 압도되었었다. 석조로 된 그 천장과 기둥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나의 모습이 서울역과의 가장 강렬한 추억이다. 왜일까? 어린 시절의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행의 부분도,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떠나기 전의 설렘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미 커버린 내가 가늠할 길이 없는, 어린 나의 마음을 굳이 추측해보자면.

나에게 처음 기차를 경험하게 해주었던 서울역에는 이제 ‘옛’이나 ‘구’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정식 명칭은 문화역서울284. 이제는 복합 문화 공간이 되어 인스타그램 좀 한다는 힙스터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화역서울284가 아닌, 옛날 서울역이라고 불러버리고 만다. 전시를 보기 위해 이곳에 들를 때마다, 전시품보다는 그 뒤의 건물에 시선을 빼앗겨버린다. 여기가 원래는 훨씬 더 컸던 것 같은데, 같은 추억담을 읊조리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면 잠시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처음 경주 여행을 떠나던 열한 살의 내가 되어 새마을호를 기다리던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여전히 건재한 석조 아치. 오래된 품위를 지닌 조명, 벽과 천장이 만나는 곳에서 툭 튀어나온 몰딩, 작은 장식, 그런 것들을 보는 게 좋다. “그땐 그랬지”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여전하다는 게 가끔은 벅차오르는 걸 보니 진짜 옛사람이 되었나 보다.

삶은 여행이라고 해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받아들일 수 없는 헤어짐도 여행 중 만나는 누군가를 스쳐가는 일이라면, 순식간에 벌어진 사건 사고도 그저 여행 중의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라 여기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떠나지 못하는 지금도 여행의 일환일지 모른다.

자꾸만 길어지는 여행 준비에 마음이 초조해지지만, 품위 있는 표류객이 되어 나의 삶에 머물기로 한다. 이런 생각 자체가 밑도 끝도 없이외치는 파이팅! 만큼이나 김이 빠지기도 하지만, 그런 뻔한 위로에라도 기대고 싶은,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까.

멀리 있어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면 신기하게도 가까이 있는 지금의 보잘것 없음이 다소 줄어든다. 도망치고 싶은 현재가아니라 곧 떠나야 할 현재라고 바꿔 생각하면, 성실하게 살고 싶어진다.
곧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면, 갑자기 지금 이곳의 기억을 엉망으로 내버려둘 수가 없다.

말끔히 살다가 떠나야지. 가까운 것에서 멀어져야지. 그리고 멀어진 가까운 것을 그리워하고, 가까워진 멀던 것에 질려야지. 그렇게 다시떠나는 설렌 마음으로 떠났던 곳에 돌아와야지.


글·사진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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