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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4 스페셜

숨고 싶은 계절, 불현듯 섬으로

2021.12.14 | 제주

인생에서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꿈 빼고 다 이루었다 치부하던 때가 있었다. 오늘과 어제의 경계는 현관 앞에 놓인 새벽배송 택배 상자였고, 무한한 듯 유한한 TV 채널과 유한한 듯 무한한 유튜브 콘텐츠 사이를 밤새 배회하다 잠들었고,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딱히 없어서 잠들었을 때보다 더 고요하게 깨어 있던 시절이었다. 모든 게 적당한 곳에 원하는 모양새로 있어서 이대로 박제시키고 싶기도 하고 때론 정말로 그렇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트집 잡을 데가 없고 시비 걸 사람이 없었다. 문득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따분했다.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아니 하다못해 온라인 강의로 민간 자격증 하나라도 획득한 뒤였다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그때의 공허함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물론 누가 내 심정을 헤아려준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내 그릇이 원체 작았고, 그래서 너무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고, 어쩐지 이제 쏟아질 일만 남은 것 불안감에 그냥 내 손으로 냅다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던 때였다. 잠깐이라도 내 인생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었다. 이따금 목을 죄어오는 헛헛함을 아등바등 걷어내지 않고 증폭시키기로 마음먹은 어느 날, 무턱대로 제주로 향했다. 여행 말고 이사로.
사방이 트여 있는 동시에 막혀 있고, 사람이든 물건이든 걸핏하면 부재하고, 인간의 의지나 과학의 기술보다 그날의 운과 하늘의 기분에 따라 하루 일과가 결정되는 곳. 여기 ‘제주’라는 섬이라면 나의 가소로운 고독과 염치없는 불안이 꿋꿋하고 우량하게 자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여차저차 대략 3년쯤 제주에서 보냈고, 제주에 갈 때 그랬듯 어느 날 홀연히 섬을 떠났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제주에 갔다. 이번엔 여행.

[©박코끼리]

오늘은 ‘그리움’ 한 송이를 주웠네
마흐니숲
숨고 싶은 마음은 바다보다 숲을 찾게 한다. 나 역시 제주에 사는 동안 어쩌면 바다보다 숲을 자주 드나들었다. 사려니숲, 장생의 숲, 화순 곶자왈, 교래 곶자왈 등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숲으로 갔다. 지도도 목적도 없이 땅을 꾹꾹 눌러 걷다 보면 뭐든 한결 나아졌다. 몸도 마음도.
이번 제주 여행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숲 탐방을 고심하다가 가보지 않은 숲에 가보기로 했다. 내일 모레 ‘마흔’이 되기 때문일까. 제주의 많은 숲 중에 ‘마흐니숲’이 마치 볼드처리 된 것처럼 눈에 툭 들어왔다.
‘마흐니숲’은 당연히 나이 ‘마흔’과는 전혀 상관없고, ‘험하고 거칠다’는 뜻의 제주 고어 ‘머흐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덕분에 숲길의 난이도를 대충 짐작하고 어느 정도 각오를 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그다지 험준한 길은 아니었다.
마흐니숲으로 가는 탐방길은 제주의 유명한 오름 중 하나인 ‘물영아리오름’ 건너편에서 시작된다. 초입에는 시멘트로 덮인 매끈한 길이 깔려 있지만,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서면 삼나무 숲과 용암대지, 수직 동굴, 마흐니궤 등 제주의 자연을 압축해놓은 약 5.3km의 탐방로가 마흐니오름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지구상에 오직 제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숲, 수풀과 암석이 엉킨 채 공존하는 ‘곶자왈’을 걷다 보니 분명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중에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숲과 곶자왈은 아주 가깝지만 전혀 다르다. 이상한 말이지만, 곶자왈은 알면 보이고 모르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기억된다.
방금 지나간 게 노루일까 고라니일까 같은 걸 궁금해하며 한 시간쯤 걸었을까, 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틈만 남겨둔 채 빽빽하게 채워진 삼나무 숲에 도착했다.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호젓한 숲이어서 때론 을씨년스럽기도 했지만, 마흐니숲의 초록은 어쩐지 이런 서늘하고 쓸쓸한 공기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아니, 숲은 언제나 나에게 그런 의미다. 탐스럽게 열려 있는 것들을 수확하는 곳이 아니라 시들고 꺾어진 마음을 줍는 곳.
차에서 내려 엎어지기만 하면 닿는 숲도 있다. 그런 숲이 허접하고 못마땅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간편하게 만날 수 있는 숲에서는 왠지 떨어져 있는 마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박코끼리]

너무나 흔하고 간절한 인사, ‘안녕’
새별오름
제주의 대표적인 오름이라 할 수 있는 새별오름. 이곳에선 매년 3월마다 무탈한 한 해를 기원하는 ‘제주들불축제’가 열린다. 수년 전 새별오름에 처음 갔던 것도 그 축제 때문이었다. 야반도주하듯 제주에 왔던 그해,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새해를 보냈고 제주에서 가장 큰 지역축제가 열린다기에(그때는 정원대보름에 열렸다) 새별오름을 찾았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은 거대한 들불, 그리고 사람들의 소망을 품고 가지런히 타오르던 네 글자 ‘무사 안녕’. 정말이지 지켜보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큰 불(새별오름 전체를 태운다)을 놓는 아찔한 축제여서 나에겐 ‘축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날이었다.
새별오름은 억새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내가 제주에 살던 때만 해도 새별오름 주변 어디에도 핑크뮬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가보니 억새와 갈대의 은빛 물결에 버금가는 화사한 ‘핑크존’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쨍한 포토 스폿이 자연적으로 생겨났을 것 같진 않고, 왠지 마음이 복잡했지만 어쨌든 부정할 수 없이 예쁜 건 사실.
해 질 녘, 핑크뮬리 때문에 붉게 일렁이는 새별오름을 보고 있으니 그때의 들불축제가 떠올랐다. 아무 일도 없는 ‘무사’한 날들을 뒤로하고 수시로 ‘안녕’을 나누던 모두에게서 멀어져 홀로 들불을 바라보고 있던 시간. 그때의 내가 왜 그토록 뜨겁게 외롭고자 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 인생의 묵은 풀도 한바탕 태워졌다는 것.
외로움을 슬픔과 우울함의 가운데 토막처럼 여기며 어떻게든 따돌리려 애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그냥 나의 미들 네임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껴입으니 무심하게 차가운 바람도 이렇게나 반갑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4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박코끼리
박코끼리 : 엉성하고 유연한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여행하는 순간보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 마시는 걸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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