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대항해에 뒤늦게 몸을 실었다. 지상파 사극은 한물가지 않았나 하는 심드렁한 마음으로 1화를 보기 시작했으나… 단 며칠 만에 모든 화를 정주행하고 말았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룬 서사도 매력적이고, 다양한 캐릭터의 케미스트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건 감각적인 공간 디자인과 그 안에 놓인 기물들이었다. 의복의 다양한 색감과 섬세한 디테일까지. 드라마의 남다른 만듦새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공예, 취향이 담긴 일상의 물건들
동명의 웹 소설을 드라마로 옮긴 <옷소매 붉은 끝동>은 시청률 5%대로 시작해 점점 입소문이 나며 인기를 모으더니 자체 최고 시청률 17.4%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서사와 캐릭터 너머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정성스럽게 재현해낸 각종 왕실의 물건들이었다. 중요한 장면마다 단독 숏을 받은 궁중 채화(모시나 비단으로 만든 장식 꽃), ‘책가도’ 속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정조의 모던한 서가는 지금 봐도 멋이 넘친다. 쪽 찐 머리에 꽂아 장식하는 뒤꽂이, 조선 안경 애체, 대나무 낚싯대 같은 소품은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며 장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배우도 배우지만 미술팀 그야말로 ‘열일’ 했구나. 짝짝짝.
왕실의 모든 기물은 장인의 손길로 만드는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단순히 쓰임새를 넘어 왕족의 권위를 드러내는 목적과 상징성까지 있기 때문에 생산과 관리도 엄격하게 이뤄졌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공예품은 이후 사대부가로 내려가 고급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는데, 정조가 유난히 좋아했다는 궁중 회화인 책가도(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도 그랬다.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던 고급품 소비가 민간으로 확대된 건 조선 후기 무렵. 경제력을 지닌 상인과 농민 계층이 새롭게 주류로 떠오르며 왕족과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던 공예품이 백성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공예는 여러 단계를 거쳐 계승되며 발전해왔다. 옛사람이 만든 특정한 양식과 기법에 교감하는 과정에서 미감도 누적되는데, 공예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현재 우리 일상의 물건들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 정서에 흐르는 아름다움을 보는 관점을 공예품을 통해 역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 속 공간 곳곳에 놓인 기물에 내가 반응한 것도 이러한 교감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공예에 집중하는 국내 최초 박물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잔상이 가시지 않은 채 맞은 2022년 새해, 종로구 안국동에 자리 잡은 서울공예박물관을 찾았다. 2021년 7월에 개관한 이후 주말마다 매우 붐빈다고 해서 미루고 미루다 찾아간 길이었다. 2만여 점의 수집품과 아카이브를 소장한 연구 기관이자 동시대의 공예 담론을 형성하는 플랫폼. 서울시는 옛 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는 등 3년여의 준비를 거쳐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종로 일대는 예로부터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공예품을 만들던 장인과 경공장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지금도 크고 작은 공방이 모여 있는 안국동 한복판에 ‘공예’를 주제로 한 대규모 플랫폼이 구축된 것.
안국동 175 일대. 서울공예박물관이 세워진 땅의 이력도 흥미로운데,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소유한 땅으로 오래도록 명당으로 일컬어진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별궁(특별히 따로 지은 궁전)을 지었는데, 세종이 승하한 장소이자 고종 때에는 왕실의 결혼식이 두 차례나 거행된 곳이다. 안국동 별궁을 줄여 현재는 안동별궁 터라고 부른다. 왕실 소유이던 땅의 이력이 바뀐 건 일제강점기인 1937년. 명성황후의 먼 친족이자 친일파 갑부 민영휘의 집안에서 당시 돈 30만 환으로 부지 4000여 평을 매입해 이 자리에 학교를 세웠다. 이후 풍문여학교로 개편했고, 2017년 강남구 자곡로로 이전하기 전까지 교육의 터전이었다. 풍문여고 운동장은 현재 박물관의 너른 마당이 되어 어느 방향에서나 드나들기 편한 열린 공간으로 기능한다. 아무 생각 없이 골목을 걷다가 흘러들 수 있는 곳. 어쩐지 모두의 일상에 녹아 있는 공예의 속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에는 사전 예약 형태로 관람할 수 있는데 황금 시간대에는 매진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새해 첫 주말 오후, 길게 늘어선 예약 확인 줄에 서서 공예에 대한 관심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생각해본다. 대량생산한 물건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공예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도 되짚어보게 된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장인들
공예는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아름답고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나무, 흙, 불, 광물을 소재로 삼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드는 것. 사실 공예의 출발점은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할 길을 모색하려는 의지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삶을 누려왔다. 편리하고 아름답기 위한 노력은 생존을 거쳐 문화의 토대로 이어졌다. 실제로 인류 역사는 공예 발전의 역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공예의 가치는 일상과 맞닿아 있다는 데에서 온다. 작가가 만든 수공예 의자들이 ‘손대지 마시오’라는 안내 문구 옆이 아니라, 박물관 곳곳에 관람객이 앉아 쉴 수 있는 형태로 놓여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다양한 소재로 만든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의 의자들은 기획 전시인 <Objects 9: 공예작품 설치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9명의 작가가 완성한 설치 작품이 안내 데스크, 휴게 의자, 외벽 장식, 천장 장식 등으로 재현되어 자연스럽게 관람객과 교감한다.
상설 전시인 <장인, 세상을 이롭게 하다>는 시대마다 우리 삶에 스며 있던 공예가 어떤 모습과 의미로 이어져왔는지 정성껏 보여준다. 모호하던 공예의 개념과 흐름을 고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거시적 관점으로 보여주는 오프라인 전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공예의 발전을 크게 4단계로 구분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총 725점의 공예 자료를 전시 중이다. 왕실의 복식, 만듦새 뛰어난 금속 공예품, 수를 놓은 향낭 노리개 등 <옷소매 붉은 끝동>의 잔상으로 남은 물건의 실물을 이곳에서 발견하니 반가웠다. 지금 제품화해도 인기를 끌 것 같은 당시의 안경 케이스, 감각적인 색감의 책가도 병풍 등을 찬찬히 살펴보느라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번 전시에서 얻은 수확 중 하나는 올드하다고 느끼던 나전칠기의 재발견이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장장 2년에 걸쳐 우리나라에 단 1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나전경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재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무를 다루는 소목장, 옻칠하는 칠장, 나전을 다루는 나전장, 금속을 만드는 두석장, 이 시대 장인 네 명이 모여 고려시대 장인들의 비법을 2년간 모색해 재현한 것. 나무틀 제작과 기본 옻칠 작업에만 6개월, 금속 선과 나선 작업에 1년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각각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고 있으니 묘한 경외감마저 들었다. 기술과 예술, 그리고 시대를 초월해 연결된 존재들이 얽히고설켜 저 단아한 나전경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내 일상의 물건들
일상에 자리한 수많은 물건을 떠올린다. 만든 이의 정성과 마음을 헤아릴 만한 것이 몇이나 있을까. 가격경쟁에 내몰리며 형태와 명목만 겨우 남은 대량생산 제품들, 자연 소재가 아니어서 제대로 버리기조차 어려운 물건들, 오래 쓰이기보다 빠르게 다음 소비를 유도할 목적으로 생산한 물건이 가득하다. 작은 디테일이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처럼, 내 삶의 물건을 어떤 것들로 채우냐에 따라 일상의 완성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디자인이 아닌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7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김선미 | 사진. 김선미, 서울공예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