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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71 에세이

이라선에 올라 취향의 닻을 내린다

2022.03.28



나달나달해진 그의 사진집을 꺼내 든다. 환대의 태도를 지닌 녹색 의자도 언제나처럼 옆에 있다. 통창 너머로 부서지는 겨울 햇살의 온기. 이 순간을 편견 없이 감싸는 투명한 음악. 그래, 사진 전문 서점 이라선에서의 시간은 매번 옳았다.

인생이 구구절절해질 때면 사진집을 펼친다. 단어나 문장으로는 특정 짓기 어려운 정서가 이미지 안에서 또렷해지는 순간. 때때로(사실 대부분) 그것은 글보다 힘이 센데, 이미지 앞에서 문장의 무기력함을 찾고 나면 슬쩍 통쾌한 기분이 스미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끙끙대던 지난날에 관한 소심한 복수랄까. 진도가 더딘 원고 마감을 앞두고 사진집을 자꾸 펴는 심리도 같은 이유일 거다.

사진집을 만나는 통로
최근 들어 잘 기획된 사진 전시와 함께 사진집도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다. 서울 중구 남창동의 전시 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사울 레이터의 전시는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과 글이 담긴 ‘영원히 사울 레이터’는 출간 한 달 만에 5천 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그라운드 시소 성수에서 열렸던 ‘우연히 웨스 앤더슨’ 전시에서도 엽서와 사진집의 인기는 전시만큼이나 높았다. 아마존 사진 분야 1위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지.
지금이야 각종 전시나 페어, 인터넷에서도 외국 잡지나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을 쉽게 열람할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좋은 디자인 서적이나 외국 사진집을 한 권 구하려면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당시 나에게는 그런 책을 구하는 일종의 비밀 루트가 있었는데 신사동에 위치한 ‘한미문화사’라는 곳이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국의 그래픽 디자인 책, 사진집, 따끈따끈한 잡지들이 가득해 공간에 들어서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기억이 난다. 더 압권인 건 비닐을 씌운 책이 거의 없었다는 것. 뭐든 펼쳐볼 자유가 있었다. 그 관용의 태도가 멋져 실컷 보다가도 한 권씩은 꼭 사서 나왔었지. 나만의 예의였다.
시간이 흐르고 한미문화사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사이 인터넷에서도 쉽게 외국 사진집을 구매할 수 있었고, SNS에서는 글보다 사진이 더 유효해졌다. 그렇게 한미문화사에 관한 기억은 드문드문 희미해졌다.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
취향의 닻을 내릴 생각이 있다면 언제든 여기 머물러도 좋다는 관용적 태도, 언어가 달라도 교감이 가능한 이미지들을 목격하는 즐거움. 한미문화사에서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난 건 통의동 작은 서점에서였다. 경복궁의 서쪽 담을 따라가다가 보안여관 사이 골목길로 들어가면 파란색 프레임이 있는 사진 전문 서점 이라선을 만날 수 있다. 2016년 10월 문을 열었으니 사진만 품고도 햇수로 7년이 되는 시간 동안 그곳에 잘 머물러준 것이다. '이라선' 사람 이름 같기도 하고 일본어나 한자 같기도 하다. 여하튼 서점 이름이 특이하다고 느꼈는데 ‘이지 라이크 어 선데이(Easy like a Sunday)’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고. 서촌의 결과 맞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친구들의 제안으로 떠날 이, 아름다울 라, 배 선. 직역하면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배’라는 두 번째 의미도 생겼다. 사진집을 보며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배 같은 공간.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미지 너머의 세계는 망망대해이니 이름이 꽤 멋지게 어울린다. 일요일같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느낌도 여전히 공간 곳곳에 배어 있고 말이다.

사진집 한 권에 녹아 있는 이야기들
이라선은 오래된 초판본부터 세계적인 작가들의 절판본, 그리고 최근 출간된 책까지 다양한 사진집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서점이 책을 셀렉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다.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가의 작품집, 동시대 현상을 반영한 신진 작가의 사진집, 그리고 사진가의 책이 아니더라도 사진에 대한 관점을 환기시키는 의미 있는 책. 이라선은 취향에 맞는 사진집을 잘 큐레이션 해주기로 유명하다. 사진을 잘 몰라도 부담 없이 공간을 찾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사실 큐레이션이 없어도 밀도를 만들 수 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다양한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꽤 크기 때문. 얼마 전에도 마음에 드는 사진집 하나를 들였는데 나중에 이라선의 온라인 소개 페이지를 보니 펜티 사말라티(Pentti Sammallahti)라는 핀란드 사진가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생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가 중 한 명으로 펜티 사말라티를 꼽았다고. ‘우리 둘’이라는 의미의 핀란드어 ‘Me Kaksi’를 제목으로 한 이 사진집은 행인들, 연인들, 친구들, 동물들의 모습을 통해 묘한 유대감, 또는 긴장감 등의 정서를 느끼게 해준다. 갈색톤의 양장 커버와 표지 사진도 아주 근사했다.
같이 갔던 지인에게 이라선 스태프가 추천한 책은 일본 작가 하야히사 토미야(Hayahisa Tomiyasu)의 (‘Tisch Tennis Platte’에서 앞글자를 딴 말로 ‘탁구대’라는 뜻이다). 작가가 독일 유학 중 머물렀던 기숙사 8층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탁구대를 5년간 관찰한 사진집이다. 누군가는 탁구대 위에서 낮잠을 자고, 누군가는 놀이를 하고, 또 누군가는 춤 연습을 한다. 여기서 사진집의 매력을 다시금 꼽을 수 있는데 사진의 순서와 배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앞 페이지의 사진과 대조가 되기도 하고 그다음 이야기와 같은 연장선상의 흐름을 품기도 한다. 그 맥락들을 살피며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마련. 이라선에서의 시간은 혼자 떠나는 고요한 여행을 닮았다.

사진에 관한 이야기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멈춰 있지만 이라선에서는 사진을 매개로 한 다양한 북토크를 기획하기도 했다. 사진작가, 비평가 등을 초청해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사진을 바라보는 눈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해준다. 2021년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는데 사진가를 인터뷰해 그의 경험과 관점을 전하는 ‘이라선 테이블 토크’ 콘텐츠를 업로드했다. 사진가 최랄라를 시작으로 베를린에서 온 사진가 플로리안 봉길 그로세 편까지 올라왔지만 이후로는 콘텐츠가 멈춰 있다. 사진에 관한 관점부터 작업, 장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콘텐츠였는데 뭔가 아쉽다. 다음에 이라선을 방문하면 업데이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건네 봐야겠다.
사진 전문 서점 이라선에는 오늘도 다양한 연령대, 저마다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한참 사진집을 보다가 그냥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선결제를 하고 골라놓은 사진집을 픽업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비닐로 꽁꽁 싸매지 않은 사진집, 서점 문을 활짝 열어놓은 환대의 모습에 지난주에는 예정에 없던 사진집을 두 권이나 데려왔다. 이 공간이 오래오래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취향의 닻을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나저나 한미문화사는 여전히 신사동에 있을까? 오래전 저장한 번호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71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김선미 | 사진. 양경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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