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며 눈여겨봐둔 동네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린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려고 치면 일기에도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뭔가를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일었다. 그림을 그리며 내 안에 있는 뭔가를 끄집어내고 표현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적은 처음인 거 같다.
유화를 배우고 있다. 미술학원에 다닌 지 벌써 석 달째이고 그사이 부지런히 그렸다. 6호, 12호짜리 캔버스를 하나씩 완성했고 지금은 3호짜리 캔버스 두 개를 동시에 두고 연작을 시도한다. 아직은 기존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며 연습 중이지만 머지않아 ‘내 안의 뭔가’를 ‘내 방식대로’ 그려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때를 기다려야지.
그림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
학원에 한 번 갈 때마다 세 시간 정도 그림을 그린다. 따로 정해놓은 쉬는 시간은 없다. 그리다가 중간에 알아서 한숨을 돌린다. 물론 쉰다고 해서 캔버스 앞을 떠나지는 않는다.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동네 풍경이나 이웃집 지붕 위의 고양이를 보는 게 전부다. 선생님이 내주신 커피를 홀짝이기도 한다. 이내 다시 그리기.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그림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일단, 그림 그리기가 엄청난 육체노동이라는 사실이다. 선 하나를 잘 그려보겠다고 거북목이 되는 줄도 모르고 캔버스 가까이 고개를 처박기도 하고 붓칠의 방향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구부정하게 꺾거나 이상한 자세가 되기 일쑤다. 책상에서 글 쓸 때와는 다른 근육을 쓰는 것이다. 이건 정말 그림을 직접 그리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 사실이다. 전시장을 찾아 그림을 볼 때는 창작자의 의도나 구도, 색감 등등 그림의 구성 요소가 생각하기 바빴다. 정작 그림의 시작과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창작자의 ‘노동’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지 못했다. ‘그림=노동’을 치환해볼 생각을 아예 못 했던 것이다. 직업 화가들의 노동이 ‘예술 행위’라는 그럴듯한 말 뒤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여러 번 덧칠하는 유화의 특성상 붓 터치 하나하나가 그림이다. 이 육체의 활동이, 힘의 방향과 강세가, 집중력의 수렴과 발산이 곧 그림이다. 그림 위에 마치 몸의 자국이 남는달까. 그림 그리는 이가 퍼포머라면 그림은 그 몸의 자취, 스코어인 셈이다. 이제 막 석 달째에 접어든 초짜 수강생이 하는 말 치곤 과하다 싶지만, 그림을 그리며 알게 된 것들이 이런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일렁일렁, 몸을 써 마음을 드러내는 의지
지난 1월, 제주로 떠난 피정에서 작은 책방에 들렀다. 그곳에서 한 권의 책과 기쁘게 만났다. 화가 강요배의 <풍경의 깊이-강요배 예술 산문>(돌베개, 2020). 두툼한 책을 훑다가 마법처럼 펼쳐진 한 페이지에는 그때의 내게 딱 필요한 화가의 질문과 대답이 있었다. 화가가 묻는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화가가 답한다. “미술을 한다는 것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혼동이다.” 나 역시 종종 미술과 그림, 회화라는 말을 혼용하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 단어들 사이에 꽤 다른 범주와 범례,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미술도 회화도 아닌 ‘그림을 그린다.’ 화가는 ‘그림’이라는 말에는 조금 다른 뜻이 있는 것 같다며 말한다. “그리고 싶어 하고, 또 그리는 행위에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스며 있다. 어느 정도 평평한 곳에 몸을 써서 마음을 나타내려는 의지가 있다. 몸을 통해 흐르는 마음 같은 것이라 해야 하나.”(<풍경의 깊이>, 310쪽) 무릎을 탁! 쳤다. 서점에 있는 사람 아무라도 붙잡고 호들갑을 떨고 싶었다. ‘여기 좀 보세요,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숙제였던 그림 그리기와 달리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다니. 그 마음 나도 모르겠어서 신기했는데 이 경험 많은 화가가 내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몸을 써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일어난 것이라고. 마음에서 ‘뭔가가 일어났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쓰는 일’, 그것을 소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전하는 일, 그런 마음을 잘 알고, 그런 마음의 상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흥했다. 왠지 모르게 그런 것들 앞에서는 경직돼 있던 내 마음의 빗장이 스르륵 열리고 마음속에는 어느새 몽글몽글한 기운이 샘솟는 것만 같다. 애틋해지는 기분이랄까.
모호하고 명료한 추상의 과정
도대체 마음이 뭐길래 이러는 걸까. 화가도 역시나 궁금했나 보다. “(마음이란) 몸 안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지향인지,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인지, 점차 형성되어가는 그 무엇인지가 뚜렷하지 않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한 탁월한 비평가의 말대로 아직은 모호한 어떤 마음을 낚는 일인지 모른다.”(앞의 책, 같은 페이지) 마음을 낚으려면 외부의 사물이나 생각거리가 필요하고, 낚는 방식이 곧 ‘추상화’의 과정이라고도 덧붙인다. “추상화를 두고 애매모호한 그림이나 기하학적 세계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추상화란 명료해지는 과정이다.”(앞의 책, 312쪽) 얼핏 충돌하는 개념처럼 보이는 모호와 명료라는 두 단어가 하나의 문장 안에서 그럴듯한 완결이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일던 그때의 나는 지친 심신을 한 채 이리저리 마음을 더듬대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는 언제나 그렇듯 예상할 수 없고, 지나온 길은 그때그때 다른 얼굴을 해 보인다. 지난 시간을 나름 충실하게 잘 다져왔다 생각할 때면 그래도 다가올 시간이 조금은 안심되기도 한다. 그런 때 또 어느 날은 모든 게 다 허상과 유령처럼 느껴지고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일도, 인간관계도 어째서 매번 처음인 것마냥 낯설고 어려운가. 웬만해선 크게 동요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다가도 일순간 허물어질 때면 아직도 멀었구나 싶다. 마음을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두루뭉술하나 분명 여기 있는 실체로서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고 싶었다. 그림 그리기를 통해 시도 중이다. 모호하지만 명료해지는 마음의 추상, 추상화로 드러나는 마음의 자취.
그 마음, 어떻게 볼 수 있나요?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그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마음을 낚아 올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사물이나 생각거리를 들여다봐야 한다는데, 그건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더 밀어붙여서 더 나아가야 하고, 더 해체해야 한다. 소리 같은 것들, 물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해체한 다음, 다시 다른 식으로 리듬, 음향, 자연의 소리를 화면에서 조합하려고 한다. 그림에 음악과 춤, 리듬 같은 것만 남았으면 좋겠다.”(앞의 책, 320쪽) 화가의 이 말에 이어 떠오르는 이들이 있다. 화가 폴 세잔과 작가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페터 한트케, 아트북스, 2020)을 통해 페터 한트케는 폴 세잔의 자취를 자신의 방식대로 되짚는다. 한트케는 세잔이 연작으로 그릴 만큼 몰두했던 생트빅투아르산으로 직접 찾아간다. 그러면서 세잔이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사색을 시도했던 방식, 즉 앞서 언급했던 외부의 사물과 생각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를 탐구한다. 그것은 세잔과 생트빅투아르가 한트케에게 가르쳐준 것이자 한트케가 자신의 글쓰기의 방편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제, 즉, ‘어떻게 볼 것인가’는 영화가 직면해온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쓰고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내겐 꽤 중요한 지점이다. 그래서 ‘어떻게’ 본다는 말이냐고? 한두 문장으로 어떻게든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저 노련한 화가들과 저명한 작가와 그들의 영향 아래 있는 영화들을 따라가며 짐작하고 찾아보고 탐색하는 수밖에 없다. 부단히 몸을 써가며 내 앞의 캔버스에 붓칠을 하는 수밖에.
아, 앞서 말한 3호짜리 연작은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이다. 3월에는 그 산을 보려 한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71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