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혜림]
2001년, 나는 부산에서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에 왔다. 취직은 했지만 그 외의 기반은 없었고, 월급은 무척 적었다. 처음엔 고시원을, 몇 달 뒤엔 비가 새는 월세방을, 이후엔 반지하 전세를 거쳐 2004년엔 지상의 비가 새지 않는, 해가 드는 투룸을 얻을 수 있었다.
숨 가쁘게 달려오던 타향살이의 고달픔이 익숙해졌다. 임시 거주지 같은 느낌의 자취 ‘방’이 아닌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생겼지만, 가구도 옷가지도 몇 개 없이 텅 비어 있어 무엇을 채우면 좋을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중학생 시절 좋아하던 선생님께서 “너희들, 시험공부할 때 커피 마시지 말고 차를 마셔봐, 처음엔 쓰고 떫고 이상하다 싶겠지만 맛이 들면 건강에도 좋고 커피보다 좋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중학생의 나는 바로 슈퍼에서 판매하는 설록차 티백을 샀다. 처음 마셔본 녹차는 쓰고 떫었지만, 왠지 이것을 마시면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처럼 멋진 어른이 될 것 같았다. 책에서만 보던 티타임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기에 한동안 인상을 쓰며 뿌듯한 마음으로 녹차를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차를 본격적으로 접했던 2004년은 마침 웰빙 바람이 불어 차, 아로마, 요가 등 ‘잘 먹고 잘 사는’ 내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높아진 때였다. 마침 생일이었던 나에게 친구는 생전 처음 보는 보이차를 선물했다. 녹차 티백만 마시다가 덩어리가 진 채 까만색으로 우러나는 차는 처음엔 놀랍게 느껴졌다. 그러나 쓰지도, 떫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맡던 깊은 숲 향이 나는 차를 마시는 순간, 온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나는 몇 년 만에 숨을 아주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곧장 전문 다기도 마련해 차의 세계에 푹 빠졌다.
보이차와의 첫 만남, 그 이후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만히 앉는다. 물을 끓이고 다구를 덥혀 차를 우려내고 그것을 한 잔씩 마시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시간은 휴식이자 치유의 시간이고 자기 성찰과 명상의 시간이었으며 내가 나를 대접하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차와 관련된 책을 읽고 다양한 차를 하나씩 맛보면서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건강에도 이득이 있었다. 오래 달고 살던 비염과 손발냉증도 서서히 사라져갔고, 소화불량도 좋아졌다. 알면 알수록 녹차, 홍차, 백차, 황차, 청차, 흑차, 허브차, 한방차…. 세상엔 얼마나 차가 많던지, 모든 차를 마시고 싶었다. 어쩜 식물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향과 맛이 나고 몸에도 이로운지 늘 신기했다. 종교는 없지만, 우주의 조물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차와 사랑에 빠져 사는 동안 이렇게 좋은 차를 주변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친구들과 같이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술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이롭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차를 즐긴 지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차 전문가가 되어 티 클래스를 열고 사람들에게 차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차 즐기기, 어렵지 않아요
사람들은 차를 배우는 것을 어려워한다. 마시기까지의 절차가 복잡하고, 왠지 무릎을 꿇고 정자세로 마셔야 할 것 같아서다. 차를 마시기 위한 도구도 비쌀 것 같은 선입견이 있다. 건강하고 향기로운 차에 대한 관심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커피만큼 전문점이 많지도 않고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도 드물다. 한국의 차 문화의 대중화는 이제 꿈틀거리는 태동기가 아닌가 생각해보곤 한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차가 어려운 존재는 아니다. 예로부터 약용으로 시작되어 식용이 되었고 이후 건강 음료로서 서서히 발전해나갔다. 다 같이 모여 차를 마시며 시와 글, 음악과 청담을 나누는 사회 교류적인 목적으로 발달해나갔고, 의례와 제례 등의 국가 행사에도 사용되었다. 생각해보면 현대의 차도 크게 다르지 않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녹차를 떠올려보자. 약의 원료로서, 건강 음료일 뿐 아니라 아이스크림, 빵, 과자 등 먹거리로도 활용된다. 녹차를 우려내면서 사람들은 정신적 위안을 얻고, 쉬는 시간엔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도 한다.
내가 타인에게 차를 알릴 때 가장 중점으로 두는 것은 ‘일상 속의 차’이다. 커피처럼 늘 곁에 있는 차. 좋을 땐 좋아서. 슬플 땐 슬퍼서, 화가 날 땐 화가 나서 술처럼 마실 수 있는 차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 차를 접할 땐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 초보자에게는 티백도 좋은 접근법이지만, 좀 더 맛있게, 그리고 미세 플라스틱 걱정 없이 마시려면 스테인리스로 된 다양한 ‘티 스트레이너’를 추천한다. 작은 크기부터 머그잔에 풍덩 담글 수 있는 큰 크기도 있다. 대개 오천 원에서 만오천 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간편한 방식으로 차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이런저런 다양한 이유로 차가 떠오르는 ‘다인’이 된다. 많은 이들이 내가 느낀 차의 위안을 함께 느끼기를 바라본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72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옥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