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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총 5차의 시험을 거쳐 대원방송 2기 전속 성우가 되었다. 보통 1차 파일 제출, 2차 스튜디오 실기 시험, 3차 면접이 일반적이지만, 내가 본 시험은 한마디로 좀 지독했다. 두 차례의 파일 제출, 두 차례의 스튜디오 테스트, 마지막 임원 면접까지 총 다섯 차례의 시험을 거쳤으니까 말이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염원을 가졌었는데 삶은 나를 한껏 비웃는 중이다. 나는 오늘도 오디션을 봐야 한다.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발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시험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점수’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지식만 배우는 게 아닌데 평가는 오직 그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싫었다. 심지어 그 결과는 싸늘하기 짝이 없는 열 개의 숫자로 규정되지 않는가. 대학 방송국에서 방송을 경험하고 그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아나운서가 되어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나운서 시험에는 또 그 숫자로 규정되는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해서도 그런 식으로 평가받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보니까 성우 시험은 오직 실기로만 진행됐다. 영어 성적도, 시사 상식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대본을 어떻게 소화하는지, 그것으로만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그때는 이것이 정말 인간적이고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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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생활을 마치고 복학 전,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아무 준비도 없이 내 인생 첫 성우 시험을 봤다. KBS 공채 시험이었다. 만약 그때 합격을 했다면 내가 결혼할 때 축가를 불러준 박지윤 누나(〈겨울왕국〉의 안나)랑 동기가 되었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성우 학원에 등록을 하고, 그러고도 한참 여러 차례의 시험을 봐야 했다. 그리고 결국 성우 역사상 가장 많은 차수의 시험을 보고 성우 협회의 일원이 되었다.
지망생 때 MBC 성우인 조현정 선배(〈코렐라인〉의 코렐라인)에게 연기를 배운 적이 있다. 성우가 되고 나서 선배와 같은 작품 오디션을 봤다. 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하게 오디션을 보고 나오는데 선배가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는 나의 믿음직한 연기 스승님께 도움을 청했다.
“선배님, 저 요 밑에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 카페에 내려가 나는 오디션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준비했다. 오늘 선배에게 오디션의 묘수를 뽑아내리라. 잠시 후, 카페 문이 열렸고 나의 동공도 크게 열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선배의 동공도 활짝 열려 있었다. 선배는 터덜터덜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며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야, 도대체 오디션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거냐?”
수많은 시험을 거치고 오디션과 함께 살아가면서 겨우 깨달았다. 점수화되지 않은 시험 역시 별로 인간적이지 않고 그렇게 공평하지도 않다. 영 비인간적이고 불공평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나중에 종종 학원이나 연기 관련 학과에 초청되어 심사를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무수히 많은 토마토스파게티를 연달아 먹고 맛을 평가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식으로 개중에 가장 맛있는 스파게티 몇 개를 뽑아야 했다. 나는 면이 꼬들꼬들하고 간이 너무 세지 않은 쪽을 좋아하지만, 보통 심사위원은 한 명이 아니다. 여기서 〈요리왕 비룡〉의 한 장면처럼 모든 심사위원의 머릿속에 낙원이 그려지는 맛을 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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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그 비법!
성우 공채 시험을 비롯한 이런 오디션 형태의 테스트에서 정말 묘수나 비법은 없는 것일까? 로또 노하우도 알려주겠다는 사람이 있는 세상인데 오디션으로 스파이더맨 역할도 맡고 알라딘 역할도 맡은 유명 성우가 “그런 비법 따위는 없으니 우리 차라리 기도나 열심히 합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특히 성우를 지망하는 이들에겐 너무 재수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요즘 시험 철이다. 그래서 100% 철썩 붙는 필살기는 아니지만 내가 깨달은 몇 가지 팁을 공유하려고 한다.
첫째, ‘요리왕 비룡’은 잊는다.
우리는 전속 성우로 취직을 하려는 것이지 아카데미 시상식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너무 엄청난 업적을 세우려고 마음먹으면 쓸데없이 힘을 주게 된다. 심사위원 머릿속에 낙원을 그리겠다는 환상은 버린다. 심사위원석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겠다거나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쏙 빼겠다는 목적은 섣불리 갖지 않는 게 좋다. 안 그래도 어려운 시험인데 요구하지도 않은 과업을 왜 스스로 부여한단 말인가. 그 업무에, 그 배역에 적합한지 따지는 테스트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둘째, 힘을 빼야 한다.
쓸데없는 힘을 빼는 이유는 쓸모 있는 힘을 주기 위해서다. 최선을 다한다고 온몸에 있는 대로 힘을 주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힘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만약 당신이 멋지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면 연기하는 내내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소리를 지를 이유가 합당한 타이밍에 단 한 글자를 꽂아넣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윙크하는 표정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카메라 앞에서 내내 한쪽 눈을 감고 있는 배우를 떠올려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셋째, 지식과 기술을 구분해야 한다.
나는 탁구를 좋아해서 한동안 레슨까지 받으며 열심히 게임을 하러 다닌 적이 있다. 게임 승률이 가장 낮아지는 구간은 레슨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그 기술의 작동 원리를 알게 되면 실제 게임에서 금방 구현이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지식일 뿐이다. 훈련을 통해 내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진짜 기술이 된다. 무언가를 오래 배우면 지식이 많아진다. 그렇지만 그 지식이 정말 기술로 변환되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시험에서는 아직 지식 단계에 머물러 있는 설익은 기술은 배제하고, 확실한 기술로 승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넷째, 전력을 다한다.
누구나 자신의 강점이 있다. 그 강점은 자신에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때로는 그 존재를 잊고 살기도 한다. 전력을 다한다는 말은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모으라는 뜻이 아니다. 있는 힘만 쓴다. 이것은 지식과 기술의 구분보다 더 중요하다. 약점은 철저히 감추고 강점만 드러나게 한다. 씩씩한 목소리가 강점이면 호탕하게 연기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강점이면 화를 내도 부드럽게 타이르는 편이 낫다. 몸매가 좋은 사람이면 ‘에이, 성우 시험인데…’ 하지 말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유머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웃긴 소리를 한다. 피디에게 돈 봉투를 찔러주거나, 방송국 사장님이 친척이라서 청탁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유난 떨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강점을 어떻게든 이 한 시험에 모두 녹여내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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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당신이 이 시험을 통해 이룩해야 할 목표는 ‘합격’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거의 모든 일의 본질은 좋은 기억과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성우 시험이든, 입사 면접이든, 사업 미팅이든 명목상으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을 원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력도 여러 강점 중 하나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든 경험에서 좋은 기억을 얻기 원하며, 그건 하루 종일 귀에 진물이 나도록 같은 대사를 듣는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연기로 경쟁자를 압살하고 정상에 올라서려고 하기보다는, 좋은 기억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게도 좋은 기억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당신은 언젠가 성우가 되어 있거나, 굳이 그 타이틀이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나를 위해 시험이 존재한다. 내가 시험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은 뇌리에 박히기 참 좋은 거짓말이다. 세상은 1등도 기억 못 한다. 세상의 기억에 남기 위해서는 상대성이론이나 적어도 아이폰 정도는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완전히 정반대로 폴란드를 침공하고 유대인을 심하게 괴롭혀야 한다. 세상이 기억하든 말든, 나와 당신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내 얼굴을 잊지 않고, 내가 엄마, 아빠를 잊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당신이 나처럼 딸을 낳는다면, 그녀는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더럽지 않다. 심사위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내가 어느 정도로 애를 쓸 수 있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면, 그 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쓸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시험이다.
글. 심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