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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74 에세이

모자 가족 웅이네의 봄

2022.05.30 | 지방에서 올라온 홈리스 여성이 갈 곳이 없다며 우리 시설에 전화를 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동반한 상태였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선제 검사를 받아야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아이와 함께 있으니 속히 오라고 해서 긴급 보호를 했다. (중략) 아이를 동반한 홈리스 여성이 안전한 거처를 찾는 건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인데 걱정이다.

ⓒunsplash

식목일을 막 지나 지금쯤이면 실내에서 겨우살이를 하던 식물들을 밖에 내놓아도 되겠지 싶은 날이었다. 지난해에 원예 프로그램을 하면서 생긴 작은 다육이들과 공기 정화에 좋다는 여러 식물이 사무실과 식당 귀퉁이 등지에서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겨울을 나고 있었다. 화분에 꽂을 수 있는 작은 조명으로 빛을 보충해주긴 했지만, 아무려면 자연의 빛과 바람만 하겠는가. 작은 포트의 잎들이 어째 힘도 없고 잎 끝이 누렇게 색이 변한 것도 있었다. 미루지 말고 봄볕을 쪼여줘야겠다 싶어 옥상과 각층 계단에 화분을 내놓고 깨끗하게 목욕도 시키고, 좀 더 큰 화분에 분갈이도 하며 예뻐지는 모습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할 즈음 함께 힘쓰던 실무자가 전에 시설을 이용했던 웅이 엄마(가명)한테 전화가 와서 급히 지하철역까지 나가봐야겠다고 했다. 어쩌면 차 한잔하고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단다. 웅이 엄마? 이름이 낯설진 않았지만 얼굴은 가물가물했다.

올망졸망 화분들이 현관과 계단 곳곳에 놓여 시설이 모처럼 화사해졌을 때, 아이가 떠드는 소리와 함께 웅이 엄마가 들어섰다. 시설 근처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섭섭해서 인사도 드릴 겸 왔다며, 웅이가 이렇게 컸다고 아이를 앞세우고 인사를 시켰다. 그때 사실 나는 아이도 엄마도 정확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 인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엄마 얼굴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 그런지 낯선데, 아이는 어릴 때 얼굴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참 많이 컸다고, 건강해 보여 참 좋다고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실제로 아이는 낯이 익은 듯도 하고, 더구나 이름이 꽤 독특해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는지 전화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아하 했었다. 웅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시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구경하고, “저기 화분이 되게 많아요. 같이 가봐요.” 하며 엄마를 끌고 갔다가 오고 하는 짬짬이 계단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인사만 하고 곧장 가봐야 한다니 들어와 차를 마시자 하기도 뭣한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취업 성공 패키지 교육을 받고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 그 일을 하고 있단다. 아주 잘되었다고, 잘 지내는 것 같아 참 좋다고 거듭 격려하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진짜 그런 마음이었다. 노숙과 같은 위기를 경험한 여성들 중에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회복지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사회복지를 공부하기도 하고, 신의 뜻에 따라 힘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신학을 공부하는 사례도 있으며, 그 외에도 컴퓨터 기술, 요리 등등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공부 끝에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 직종의 전문가가 되어 다시 만나는 예는 흔하지 않다. 어디에 사느냐고 했더니 어디 어디 임대주택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정말 잘되었다고 또 축하했다. 지역사회에서 일을 하고, 안정된 주거지에서 지내고, 특별히 아픈 데도 없이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니, 그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탈노숙이다. 사회복지시설의 사회복지사라면 으레 그게 궁금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웅이 엄마는 이제 기초생활수급자에서도 벗어났다고 자랑스레 밝혔다. 기초생활수급가정일 때는 월 80여 만 원을 받아 아이와 함께 생활하느라 무척 빠듯했는데, 지금은 취업해서 급여를 받으니 그때보다 생활에도 훨씬 여유가 생겼다며 뿌듯해했다. 탈노숙에 이어 탈수급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며 참 잘되었다고, 앞으로 재미나게 잘 살기만 하면 되겠다고 덕담을 한참 들은 뒤 웅이와 웅이 엄마는 경쾌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갔다.

홈리스지만, 엄마의 이름으로

웅이네 가족이 돌아간 뒤 언제 와서 어떻게 지내고 갔는지 궁금해져서 관련 기록을 찾아보았다. 웅이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전인 6년 전쯤 한 달 조금 넘게 지내고 나간 가족이었다. 그러니 일시 보호 시설 이용 여성 중 아이를 동반한 경우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해도 내가 지금까지 그 가족의 얼굴과 사연을 기억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민망하긴 했다. 시설을 찾아왔던 때 웅이 엄마는 20대 중반의 젊은 아기 엄마였고, 웅이는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기였다. 생후 5개월짜리 아기를 짧은 시간 보고 한참 커버린 웅이에게 어릴 때 얼굴이 남아 있다고 인사한 건 완전히 틀린 빈말인 셈이었다.

그나마 상담 기록은 웅이네가 한 달여의 일시 보호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상기시켜주었다. 웅이 엄마는 남편이 사기에 휘말려 빚을 지는 바람에 임신한 상태에서 노숙 위기에 몰릴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컸고, 집을 떠난 후에는 어린 아기와 함께 찜질방을 전전하다 주민센터의 소개로 내가 있는 일시 보호 시설에 왔었다. 주민센터에서는 이혼한 상태가 아니라서 한부모가정 지원이 어렵다고 했지만, 당시 웅이 엄마는 이혼할 마음은 없었다. 본인도 재혼 가정을 경험한 터라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짐작이 가고 그만큼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아이와 함께 노숙 상황에 놓인지라 긴급생계비와 긴급주거비를 신청하고 오래지 않아 급여를 받을 수 있었고, 월셋집을 얻어 일시 보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unsplash

함께 일하는 실무자가 기억하는 웅이 엄마는 아이를 무척 헌신적으로 잘 돌보는 여성이었다. 아이에게 맞는 우유와 기저귀를 요청하고, 아이가 감기에 걸리자 곧바로 병원에 데려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주민센터의 공적 서비스를 탐색해 아이와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웅이네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월셋집을 얻었는데 방이 넓어서 아이와 사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고 기뻐하며 짐을 옮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후 6년여의 시간 동안, 웅이 엄마가 아이와 살아내기 위해 넘은 산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터다. 그래도 용케 노숙의 위기를 넘기고, 어엿한 직장인이자 엄마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웅이 엄마 인생에서 내가 일하는 일시 보호 시설에서 보낸 한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웅이 엄마가 만난 수많은 만남과 인연을 헤아릴 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를 짧다면 짧은 잠시의 만남일 것이다. 그런데도 몇 년이 지나 지나치지 않고 인사를 하러 왔으니 여러모로 흔치 않은 일이다. 긴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어린 아기와 함께 노숙을 하게 된 막막한 상황에서 일시 보호 시설이 꽤 안전하고 요긴한 거처였나 보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누구나 살면서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의 누구에게도 적절한 도움을 받기 힘들 때가 있을 수 있다. 이럴 때야말로 사회의 공적 체계가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한다. 홈리스 여성을 위한 시설도 이런 비빌 언덕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지방에서 살기가 힘들어 서울로 올라왔다는 홈리스 여성이 갈 곳이 없다며 우리 시설에 전화를 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를 동반한 상태였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선제 검사를 받아야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 아이와 함께 있으니 속히 오라고 해서 긴급 보호를 했다. 며칠 후 일시 보호 시설에서 아이와 오래 지내기보다 빨리 안정적인 생활 시설로 가야 한다고 판단해 마땅한 연계처를 찾고 있을 때, 그 모자 가족은 연락 없이 떠났다. 아이를 동반한 홈리스 여성이 안전한 거처를 찾는 건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인데 걱정이다.

글. 김진미
(
여성 홈리스 일시 보호 시설 ‘디딤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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