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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1 컬쳐

떠봐야 알 수 있는, 뜨개질의 순간들 ― 뜨개질, 폭신폭신한 세계

2023.01.17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뜨개질에 열중하던 때가 있었다. 어깨가 결리고 손이 뻣뻣하게 굳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한자리에 앉아 줄곧 뜨개질만 했다.

그땐 왜 그랬을까?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 와 되돌아보면 그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듯하다. 괴롭고 아픈 마음을 느끼지 않으려고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던 때였다. 알록달록 예쁜 털실로 더 예쁜 것들을 만드는 일이 재밌어 시작한 취미 생활이 내 삶의 어려운 시기를 견디게 해주는 구원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뜨개질이 힘들 때만 큰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뜨개질과 함께 성장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뜨개바늘을 잡았을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뜨개질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다고 할까? 뜨개질을 하다 보면 작은 깨달음 혹은 통찰을 얻는 순간이 있다.'


한 코를 넘기는 순간 얻는 깨달음

ⓒ unsplash

뜨개질을 하다 보면 뜨개코를 하나 빠트리거나 꽈배기 무늬의 방향을 틀리는 실수를 하곤 한다. 초보 니터 시절에는 얼른 완성작을 보고 싶은 욕심에 실수를 애써 못 본 척하거나 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완성을 향해 부지런히 떠나가기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실수를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감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찌어찌 완성한다고 해도 그 티끌같이 작은 실수가 내 눈에는 돋보기를 들이댄 듯 거대하게 확대되어 보이고, 얼핏 보아도 내 눈에는 그 무늬만 보이는 기현상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슬프게도 그 스웨터는 잘 입지 않는, 버림받은 옷이 되고 만다. 빨리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혹은 눈속임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빚어낸 대참사라 할 것이다.

더 재밌는 건 이 같은 경험을 한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수년간 이 무한 루프를 반복하고 나서야 더 이상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뭔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 뜬 부분을 발견하면 바로 그 부분으로 돌아가(이 말은 곧 지금까지 뜬 부분을, 그것이 며칠이 걸려 뜬 분량인지와 상관없이, 실수한 지점까지 다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잡고 다시 뜬다. 물론 빨리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는 버릇도 없어졌다. 한참 뜨다가 다 풀고 다시 뜨는 것이 어쩐지 시간을 버리는 일 같고,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 같지만, 더 큰 시각으로 보면 나의 실수를 아는 즉시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허물은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것이고,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 또렷하게 드러나는 법이라는 사실을, 뜨개질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당시의 나는 그 당연하고도 단순한 진리를 알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내가 뜨개질을 하며 배운 첫 번째 교훈이다.

뜨개질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들

ⓒ unsplash

지금까지 나의 어둡고 부끄러운 모습만 공개한 것 같아 마지막으로는 뜨개질을 함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을 소개하고 싶다. 뜨개 소품 만들기를 좋아해 이런저런 소품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데, 그중 하나가 카드 지갑이다. 쓰다가 낡으면 다시 새로운 디자인으로 떠서 들고 다니는데, 카페에서 커피를 사거나 뭔가를 구입하고 카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낼 때면, 점원이 “직접 뜨신 건가 봐요.” 하며 알은체하는 경우가 많다. 그 순간 점원과 고객이라는 건조하고 공적인 관계에서 갑자기 나라는 한 인간과 점원이라는 역할을 하는 인간이 만나는 지점으로 차원 이동을 하는 듯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손뜨개 카드 지갑이 없었으면 어떤 사적인 대화도 오가지 않았을 상황에서 손뜨개 물건 덕분에 짧은 대화와 따뜻한 미소를 나누는 인간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면 완전히 모르는 타인과 아주 잠깐이지만 어떤 연대감을 느끼고, 나는 그 반짝이는 찰나를 사랑한다.

내 삶에 뜨개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보다는 조금 덜 행복했을 것 같다. 뜨개질을 하지 않아도 니트 의류는 얼마든지 사서 입을 수 있고, 편물 소품도 어디서든 손쉽게 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상상한 디자인의 옷이나 소품을, 내가 고른 털실로 직접 떠서 입거나 사용하는 즐거움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최근 들어 뜨개질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가 많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뜨개질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뜨개질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기를 바란다.


글. 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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