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인가, 어느 공연장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계절은 잊었지만 분위기는 생생하다. ‘챕터투’라는 여성 듀오의 무대를 기다리는데, 내 뒷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자면, 윤미래만큼 실력 안 되면 쪽팔려서 랩 못 해.” 그는 공연을 어떻게 봤을까? 미처 묻지 못했지만 한참 뒤에도 상황은 비슷했던 것 같다. 어떤 힙합 팬 모임에선 나는 늘 특이한 존재였다. 음악 얘기를 하다 “비트너츠(미국의 힙합 듀오) 듣는 여자 처음 봐요!” 같은 칭찬(?)을 듣거나, 별안간 상대방이 “○○가 잘생겼죠?” 같은 말을 해서 대화가 급히 종료되곤 했다. (‘얼빠’가 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귀찮아서 생략해야겠다) 나 말고도 어떤 사람들은 늘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Mnet <쇼미더머니> 시즌 11 우승자 래퍼 이영지를 응원한 이들이 진지하고 심각한 리스너가 아니라고 손가락질 받듯이.
이영지가 ‘꼭 봐 달라’고 SNS에서 얘기했던 경연곡 ‘Not sorry’의 가사는 이렇다. ‘미안해 하나도 하나도 아무것도 미안하지가 않아서, 그저 나답게 살아가고픈 것뿐’. 2006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챕터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여전사가 아니에요. 평범한 20대 여성인 우리 이야기를 할 뿐인걸요. 임신하면 임신랩, 육아하면 육아랩 할 거예요. 힙합은 전 연령에서 즐길 수 있는 장르거든요.” “당연한 것을 보게 되실 것”이란 말은 우승을 앞둔 이영지의 각오임과 동시에, 앞으로 할 그의 랩이 누구에게도 미안할 필요 없는, 필연적인 이야기일 것임을 상상하게 했다.
거친 말투와 욕이 나보다 약한 존재가 아니라 내가 넘을 수 없을 듯한 벽 앞에 뱉어질 때 한없이 빛난다는 것. 모두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무언가에 질문하는 게 ‘Show and prove’로 가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것. 내 옆 사람의 안부와 그걸 둘러싼 세상을 두루 들여다보는 눈이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 이 세계에선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성 정체성도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 내가 아는 힙합은 그런 것이라고, 이영지가 증명했다.
글.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