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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5 인터뷰

서재도 번역이 되나요? : 박선형 번역가 (1)

2023.08.24

안녕하세요, 저는 책, 그중에서도 번역서예요. 책을 통해 다른 언어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 반드시 번역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 권의 책에 작가가 오롯이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언어로 재탄생하기까지는 번역가들의 노력이 뒤따라요. 최초의 출판 번역가는 아마도 이타적인 사람이었을 거예요. 글에 담긴 아름다움을 누군가를 위해 나누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특히 사람의 진심과 생각이 담긴 에세이에서는 더 그렇죠. <사치스러운 고독의 맛>, <좋아하는 마을에 볼일이 있습니다> 등을 번역한 일본어 출판 전문 번역가이자, 양질의 번역서를 소개하는 동네 책방 ‘번역가의 서재’를 운영하고 있는 박선형 번역가를 만났습니다.


살면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문학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오랫동안 일본에 사셨던 외할아버지를 통해 일본어와 일본 서적을 알게 되었지요. 유년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의 서재는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였어요. 외할아버지가 읽어주시는 동화책이나 잡지에 쓰인 문장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어느새 더듬더듬 따라 읽기 시작했죠. 그 후로도 외할아버지가 즐겨 읽으시던 일본 작가들의 책을 두루 접하게 되면서 일본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어요.

이후에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학을 전공하고, 동시통역가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이후엔 출판사에 입사해서 출판 편집자로 수년간 일했고요. 출판 편집과 일본어 번역을 병행하다가 언젠가 제가 기획하고 직접 번역한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 근무하는 동시에 번역가로 일하기가 녹록지 않다는 걸 깨닫고, 본격적으로 번역에 집중하고자, 번역가로 데뷔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어떻게 번역가가 될 수 있나요?
막상 번역가가 되려고 하니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했어요. 출판사에 기획안을 낸다고 받아주는 게 아닌 데다 출판사에서 새내기 번역가를 써주지도 않을뿐더러 제 경우엔 인맥을 통해서도 번역 일을 구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래서 열심히 찾아보다가 출판 번역가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고, 졸업 후 번역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졸업생들은 아카데미를 통해 검토서를 의뢰받는데 그 책이 출판사에서 채택되면, 샘플 번역을 제출할 기회가 주어져요. 샘플 번역까지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새내기 번역가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에요. 사실 졸업생 중에서도 소수만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되는데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번역을 하면서, 어떤 책을 번역했을 때 가장 설렜나요?
미처 몰랐던 작가의 책이요. 번역을 의뢰받지 않았다면 제가 죽기 전까지 안 읽어봤을 것 같은 책을 만났을 때가 설레요. 심지어 책의 내용이 좋았을 때는 행운이라고 여기고 감사하지요. 번역가 이전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설레는 일이고, 번역가로서도 새롭게 발견한 좋은 책을 세상에 알릴 수 있어 두 배로 기쁜 일이에요.

주로 에세이를 번역하며 느낀, 에세이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보통 에세이를 번역할 경우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번역가가 새로 쓰는 텍스트가 많아요. 소설, 시와 같은 문학은 원문을 고스란히 옮겨야 되는데 실제로 어떤 해외 에이전시의 경우는 번역가와 편집자에게 제목부터 토씨 하나 심지어 쉼표 하나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니까요. 소설은 번역가의 문체를 돋보이게 살리기보다는 작가의 문체를 그대로 살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면, 에세이는 큰 제약이 없이 번역가의 문체로 옮길 수 있고, 문장을 다듬어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자유로움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저자보다 읽는 대상을 고려하는 점도 제 스타일에 맞아요.

유의미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에세이의 번역상 특징이 궁금해요.
일본 에세이는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현지화하는 부분이 많지요. 출판사에서도 그걸 원하고요. 그래서 원제와 다른 제목을 쓰기도 해요. 번역가의 스타일대로 자유롭게 글을 옮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게 일본 에세이 번역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특히 일본 에세이는 다양한 소재와 작가들이 있어서 골라 읽는 맛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주로 휴식을 취할 때 책을 읽는 편인데요. 에세이는 두런두런 대화하듯 읽기 편안한 장르여서 좋아요. 제가 매력을 느끼는 만큼, 편안하게 읽히는 에세이를 많이 소개하고 싶어요.

번역가님만의 번역 기준이나 원칙이 있나요?
번역가마다 스타일이 다른데요. 개인적으로는 초고가 최종 원고라고 생각하고 번역하는 편이에요. 반면 러프하게 초고 번역을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만약에 번역하다가 모르는 단어가 생길 때는 빈칸으로 둔다든지 아니면 그 문단 자체를 건너뛴다든지, 일단은 초고를 빨리 마무리하고 추후 수정을 여러 번 거치는 번역가들이 있는데 저는 완전 반대인 셈이죠. 그래서 남들보다 초고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그렇다고 교정을 보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시름 내려놓고 교정볼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해요.

그렇다면 번역할 때 지키는 규칙 같은 것도 있나요?
일본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단어가 많아요. 때로는 우리말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단어도 있어서, 풀어서 번역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 한 작품마다 단어장을 만들어요. 단어장이 쌓이면서 새로운 번역 작업을 할 때마다 도움이 많이 돼요. 다른 작품을 번역할 때 참고해서 적절한 표현을 덧붙일 수도 있고요. 일본어 사전은 굳이 찾아보지 않아요. 그럼에도 항상 새로운 단어장과 우리말 사전을 두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스럽고 새로운 표현이 없을까 궁리해요. 실제로 일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들이는 시간은 짧은 편인데, 옮긴 글을 매끄럽게 다듬고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을 지어내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요.

두 가지 언어를 다루는 번역가의 태도가 궁금해요.
일본어를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문법은 어렵지 않은 편이거든요. 그런데 단순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거의 없어요. 복합적인 뜻을 지닌 단어와 표현이 많고, 관용적인 표현도 물론 많고요. 고급 표현으로 갈수록 우리말로 직역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아져요. 한자어이기 때문에 실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원래의 의미가 이해되는 경우가 있고, 문화를 잘 알아야지만 번역이 자연스러워요. 언어도 문화처럼 계속 변화하는 만큼, 번역가는 계속 배우고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이 글은 '서재도 번역이 되나요? : 박선형 번역가 (2)'에서 이어집니다.

소개

정규환
에디터, 작가. 2023년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 고민하고 있다. @kh.inspiration

이규연
바쁜 일상 속 반짝이는 찰나를 담는 사진작가. 편안하고 차분한 사진을 좋아하고,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글. 정규환 |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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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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