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지하철 5호선 영등포시장역에서 국회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된 건 2024년 12월 7일 토요일, 오후 1시쯤이었다. 2번 출구로 나와 평탄한 길과 완만한 오르막, 여의2교를 2~30분 정도 걸으면 넓은 국회대로가 펼쳐진다. 평소라면 차가 오갔을 곳이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저녁 10시 25분경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12·3 내란 사태 후, 매일같이 시민들이 모이던 공간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대한 한 차례의 투표 불성립 후 다시 맞이한 토요일인 12월 14일, 국회 앞은 일찍부터 시민들로 붐볐다. 오후 3시쯤엔 국회를 왼편에 둔 대로에 시민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이로 마치 사거리처럼 드문드문 이동 통로를 겸하는 공간이 띄워진 채였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나에게 한 중년 남성이 결연한 눈빛으로 피켓을 건넸다. 목례를 하고 피켓을 받아들자 비로소 역사적인 ‘오늘’이 실감 났다.
지난해 12월 초 국회 앞 집회의 아이콘은 역시 형형색색의 아이돌 응원봉이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콘서트장에서 반짝이던 ‘가장 소중한 빛’이 여의도 국회 앞과 전국 곳곳을 수놓았다. 미디어도, 시민도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의 높은 집회 참여율에 주목했다. 응원봉을 흔들며 부르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도 화제였다. 이날도 표결이 진행되기 한 시간여 전인 3시 15분쯤 푸른 하늘 아래서 시민들이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했다.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를 반영한 깃발도 눈에 띄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정당 깃발과 노동조합 깃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깃발, 야구팀 깃발 등이 휘날렸다. ‘전국숭이연합회’, ‘시위 때문에 캠페인이 미뤄진 티알피저모임’ 등 재미있는 디자인과 멘트가 돋보이는 깃발도 많았다. ‘화가 난 식물 집사 연합-물은 나한테 줘야겠네’처럼 분노를 강조하거나 ‘긁?’, ‘쫄?’처럼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에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유행어도 깃발로 만날 수 있었다.
집회에서 전통적으로 흘러나왔던 곡을 따라 부르려는 1020 세대가 많았던 만큼, ‘다시 만난 세계’ 외에도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민중가요와 ‘삐딱하게’ ‘아모르 파티’ 등 다양한 노래가 국회 앞에서 흘러나왔다. 오후 4시, 시민들은 국회의원들의 탄핵소추안 표결을 기다리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응원봉과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 응원봉, 인형… 각자의 개성으로 민주주의를 응원하다
표결을 기다리던 데이식스 팬 고은(가명), 세븐틴 팬 유정(가명), ‘연뮤덕(연극·뮤지컬 덕후)’ 현지(가명)와 이야기를 나눴다. 집회 참여를 위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여의도로 온 30대 여성 세 사람은 첫 번째로 참여한 집회에서 탄핵소추안 가결을 목격했다. “계엄이 선포됐던 주에도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빠듯했어요. 오늘 꼭 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주중에 내란 사태 피의자가 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하는 등 여러 상황이 벌어졌잖아요. 국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 사람은 응원봉과 소고, ‘탄핵하라’ 머리띠를 두른 인형을 들고 가결을 맞이했다.
세 사람은 재미있는 깃발과 오가는 따뜻한 마음을 국회 앞 집회의 포인트로 꼽았다. “다들 개성 있는 깃발을 만드셨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깃발이 제작된 것도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다른 시위 참여자들에게 깔고 앉는 방석과 핫팩을 나눔 받기도 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 챙겨주고 따뜻한 말을 나누는 게 평화 집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날 탄핵소추안은 가결됐고, 세 사람은 이제 광화문으로 향할 예정이다. “국회에서 가결돼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아 있으니 인용될 수 있도록 광화문 집회에 참석해서 압박해야죠. 멀어서 자주는 못 오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참여하려고 해요.”세 사람이 최고로 뽑은 탄핵 선곡은?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를 꼽으며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 토요일이기도 해서 타이밍이 획기적인 것 같아요.” 이날 시민들은 ‘토요일 밤에’ 가사에 뒤이어 ‘윤석열 퇴진’을 구호로 외쳤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탄핵안이 가결되었음을 발표하자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이 잘 보이는 국회 2문 앞도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옆에서 내내 깃발을 들고 있던 40대 여성과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일 것 없이 손바닥을 연신 맞부딪혔다. 서로에게 축하한다는 말도 건넸다. ‘고맙다’는 그의 말이 뭉클했다. 인터뷰에 응해준 여성들이 치즈 소시지 세 개를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는 주변의 시민들에게 휴지 한 장씩을 건넸다. 한 시민이 “부모님 몰래 왔다”고 말하며 휴지를 받아들었다. 고조되던 긴장이 풀리면서 추운 겨울 길 위가 모두가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 찼다. 사물놀이패가 연주를 시작하자 시민들이 추임새를 넣고 춤을 췄고, NCT의 ‘믐뭔봄’을 든 흥 넘치는 팬들이 환호했다. 로제와 윤수일의 ‘아파트’ 리믹스가 나오자 한 청년과 중년 남성이 스텝을 밟으며 기쁨의 순간을 즐겼다. 박미경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신해철의 ‘그대에게’, BTS의 ‘불타오르네’를 부르며 해병대 예비역들도, 어린이들도, 내향인도, 외향인도 기쁨을 표출했다.
분노는 광장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이 된다
다른 시민들처럼 정치 뉴스, 유튜브 시사평론까지 빠짐없이 살피는 요즘,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탄핵안 가결 후 처음 맞이하는 월요일 신문 1면에 실린 “우리 사회 火가 너무 많다… 큰 우물 빠져 나뭇가지에 매달린 형국”(조선일보, 2024. 12. 16)과 “어쩌다 상대 진영과 밥 먹기도 꺼리는 나라가 됐을까”(신동아, 2024. 12. 17)다. 첫 번째 기사는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 인터뷰, 두 번째 기사는 ‘尹 탄핵을 보는 눈’ 특집인데, 부제로 인용된 문장은 이렇다. ‘감성의 시간 접고, 냉철한 이성의 시간 열어야’. 기사를 잘 읽어보면 정치권에 하는 조언의 일환이지만, 나는 이 문장을 통해 국회 앞으로 향한, 또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들에게 쏟아지는 온·오프라인상의 말들을 떠올리게 됐다. 너무 감정적이라거나 중립을 어기고 있다는 질책이다.

그 질책에 내가 본 풍경을 전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국회 앞은 분명 뜨거운 열망과 분노로 가득했다. 더불어 민주주의를 응원하고 서로를 챙기는 시민 간의 애정도 있었다.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에게 차별과 혐오 표현을 하는 대신, 각자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존중하자는 규칙에 많은 이들이 반성과 실천의 다짐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겨울 국회 앞에서의 시간은 분명, 모두가 동료 시민을 대하는 인내와 관용, 배려와 품위를 배운 기회였다. 이것을 잠시간의 ‘감정적인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의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엔 ‘1980년 5월이 2024년 12월을 구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한강 작가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깨달음이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광주에 큰 빚을 졌다.”는 말엔, 그리고 이 설명에 거센 박수를 보낸 시민들에겐 분명 커다란 감정이 있다. 도저히 ‘중립’일 수 없다는 의지도 있다. 그 감정과 의지가 2025년 1월까지의 민주주의를 매만져 갈고닦은 힘이라는걸, 나는 국회 앞에서 목격했다.
글 | 사진.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