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동안 길거리 노숙을 하고 내가 일하는 여성 홈리스 일시보호시설을 찾아온 모자언니(별명)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자언니를 시설로 안내한 주민센터 담당 공무원은 그녀가 이번에 심사를 받아 수급자격을 갖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일주일가량 늦게 수급비를 받게 될 것이라며, 그 돈이 있어야 거처를 마련할 수 있으니 당분간 시설에서 지내도록 할 수 없냐고 문의했다. 아마 월세를 못 내서 노숙할 위기에 처했나 보다 생각하고 오셔서 상담해보자고 했었다. 모자언니는 통화했던 그날 저녁 어둑해질 무렵에 전철에서 내려 물어물어 찾아왔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시설을 찾기 전에 그녀는 집이 아니라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멋 삼아 쓰는 모자에 외출복 차림을 하고 위생 상태도 깨끗해서 지난해 12월부터 길거리 숙박을 했다는 게 뜻밖이었다.
연결 통로
들어보니 모자언니는 경기도의 꽤 번화한 도시, 번화한 역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그 역은 백화점과 연결돼 있어서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연결 통로를 셔터로 막아두지 않아서 잠자리로 이용할 수 있었다. 백화점이 난방을 하는 덕분에 겨울날에도 비교적 따뜻하게 밤을 보낼 수 있더란다. 더구나 그곳에는 안전 요원들도 있어서 덜 무섭고 얼마나 좋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연결 통로에 자리를 잡기 불편한 날에는 장애인 화장실에서 자는 날도 있었다. 청소가 모두 끝난 늦은 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편의점에서 박스를 구해다 화장실 바닥에 깔고 누우면 드나드는 사람도 거의 없고 조용하게,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식사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들의 도움을 받았다. 식당에 가서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나 쓰레기 정리, 청소를 도우면 보통 밥은 마음껏 드시라고 하더란다. 주변 상인들과 시민들의 도움으로 그렇게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어떤 홈리스 여성들은 인근의 유명한 무료 급식 장소를 찾아가 식사하기도 하더란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있었던 역에서보다 더 많은 홈리스를 볼 수 있었고, 여성들도 꽤 되더라고 했다.
놀란 것은 모자언니가 지내던 역사와 백화점 여기저기에 여성 홈리스로 보이는 이들이 20여 명은 되더라는 것이었다. 서울시나 정부는 1년에 몇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한날한시에 거리, 시설 같은 노숙지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을 집계하는 일시 집계 조사를 한다. 그 결과를 찾아봐도 그 도시에서 그렇게 많은 홈리스 여성이 집계되지는 않는다. 어떤 날 한 시점에 확인한 홈리스의 수가 그 지역에서 홈리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다 포착해내지는 못하는 것일 테다. 모자언니는 예전에 그 백화점에서 2년쯤 청소 일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주변을 속속들이 알았고, 눈에 잘 안 띄어 노숙하기 좋은 장소도 알고 있었다. 해서 다른 홈리스 여성들 몇몇에게도 좋은 장소를 알려줘 많이 ‘숨겨줬다’고 했다.
멍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자가 가려서 금방 안 보였던 것이지 얼굴 옆 눈가에 푸른 멍이 있는 듯했다. 얼굴에 멍은 왜, 다쳤냐 물었더니 맞았다고 한다. 노숙하는 곳에 얼마나 별별 사람들이 많은지 노상 다툼이 있는데 어찌어찌하다 맞았다고 한다. 큰일 날 뻔했다고, 신고는 했냐고 하니 또 금방 아니 뭐, 그냥 계단에서 넘어진 거여서,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여하튼 길거리 노숙지에서는 다툼이 엄청 잦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도 정말 별것 아닌 문제로 늘 싸우더라 했다. 그 별것 아닌 문제가 뭐냐니까 손짓으로 땅에다 금을 긋는 시늉을 하면서 “내 자리가 요긴데 요 선 넘었다고, 아이고” 하면서 아주 작은 일로도 매일 그러더란다.
길거리 노숙지는 매우 거친 곳이다. 더구나 여성이 안전한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면 남성들이 추근대거나 위협하는 예도 종종 있던데 모자언니 님은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다. 자신은 웬만하면 피해 다녔다고 한다. 아예 상대를 안 해야 한다며.
모자언니가 집 없이, 가족과 연락도 잘 안 하며 지낸 것은 이혼을 하고 집을 나온 후니까 2년쯤 되었다. 그때부터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 전까지는 식당 일을 하며 살았다. 숙식이 제공되는 식당이었으므로 다른 거처는 없는 셈이었다. 전부터도 허리가 아파 디스크 수술을 했는데 어느 때부턴가 다시 아프기 시작해 식당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는 목사님께 사정을 얘기했더니 자기 집에 방이 하나 남는다며 오라고 하더란다. 염치 불구하고 찾아갔는데 하루 만에 나오게 되었다. 목사님 부인이 어찌나 까탈스럽게 구는지 지낼 수가 없더란다. 자기 가족도 함께 사는 게 힘든데 모르는 사람이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너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던 듯하다. 하루 만에 더부살이가 끝나고 주민센터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고, 수급 신청을 하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라는 설명을 듣고는 자신이 살았던 동네 옆의 그 번화한 노숙지를 찾아가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뚝뚝 끊어내
60대를 목전에 두고 이혼했는데 나누어 받은 재산은 없었냐 물었더니 무슨 돈이 있어 나누냐며, 같이 살 때도 다 자신이 일해서 “먹여살렸다”고 한다. 남편은 가정폭력을 일삼을 뿐이었단다. 신고가 되어 몇 번이나 경찰이 출동했고 ‘그럴 거면 이혼하라’고 도리어 호통을 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혼은 하지 못했고, 경찰이 출동할 때마다 경찰관에게 창피하더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왜 그때, 더 일찍 이혼을 하지 않았냐 물었다. 자식들이 있는데 상처가 될까 참았다고 한다. 이제는 자녀들이 다 커서 대학도 졸업했고 결혼한 자식도 있고 해서 자식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이혼을 하고 집을 나왔단다. 두 달이나 노숙을 할 정도였으면 자녀들에게 도와달라고 연락을 하지 그랬냐 했더니 “자식이 오히려 손을 벌리는데 무슨, 대학교를 졸업해도 부모에게 돈을 달라는데 뭐를 도와달라 하겠냐.”며, 그래서 자신이 먼저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 뚝뚝 끊어내야 차라리 살 수 있다며.
모자언니는 수급비를 받으면 자신이 살아왔던 익숙한 동네에 가서 방을 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주거급여를 받으면 월세 35만 원까지는 낼 수 있다는데 보증금이 없는 집이 있을런가 모르겠다며. 보증금이 없는 방이라면 고시원이 떠오르는데 모자언니께서 자리 잡고자 하는 동네에도 마땅한 고시원들이 있는지, 아니면 보증금 없는 월세방들이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열심히 알아보자고 이야기했다. 평생 안전하지 않은 집에서의 생활과 2년여간의 홈리스 생활을 견디고, 두 달간의 거친 노숙에서 살아남은 모자언니가 진정 안전하고 인간다운 거처를 마련하기까지 함께 찾아봐야 할 날들이 남았다.
[소개]
김진미
여성 홈리스 일시보호시설 ‘디딤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