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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33 컬쳐

농민필설 - 우리가 먹는 것을 우리가 생산하기 위하여

2025.04.23

나는 농부다, 여성 농부다, 청년 여성 농부다. 충남 아산에서 유기농 배 농사를 짓고 있다. ‘남태령 대첩’으로 불리는 농민과 시민들의 집회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지만, 농민들이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 트랙터를 몰아 눈보라를 뚫고 먼 지역에서 수도권까지 진입했는지, 국회에서 통과되어도 정체 상태로 법안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양곡관리법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한국 농업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면 잘 알기 어려운 실정이다. 농민 당사자 입장에서 현재 농부들은 왜 ‘먹고살기 어렵다’고 느낄까. 먹거리가 풍성한 현대사회에서 한국의 농업 자급자족은 왜 이뤄지지 못할까. 도시인들은 배추, 과일값이 비싸다고 하는데 그 수익이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전부를 다룰 순 없겠지만, 농촌 현지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 농부의 입장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마트에 가면 진열대를 꽉 채운 어마어마한 양의 먹거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걸 다 누가 먹어치우는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끔하게 포장되어 가지런히 놓인 농산물, 수산물, 축산물, 유제품, 가공식품, 즉석식품. 이 광경은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마트 매대 4분의 3이 텅 비어버린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날은 패닉에 빠진 시민들로 인해 전국적인 폭동과 약탈이 일어날 것이다. 대규모 기아 사태로 국가는 비상 상황에 즉각 돌입할 것이다.

장작을 넣어야 불이 타듯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나 밥을 먹어야만 한다. 예외는 없다. 인류는 궁극적으로 보면 배불리 먹고사는 것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역사를 발전시켜왔다. 우리의 조상들은 사냥보다 효율적인 농업을 발명했고, 기나긴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쳐 더 풍성하게 결실을 수확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열량을, 얼마나 더 빠르게 얻을 수 있는지 고민했다. 옥수수의 조상 격인 테오신트는 손가락만 한 길이에 한 줄기로 자라나며, 그 줄기에는 홀쭉한 알갱이가 5알에서 많으면 12알 정도 맺힌다. 인류의 지혜로 육종되어 개량된 현대의 옥수수는 한 뼘이 넘는 길이의 굵직한 자루에 500알 정도의 통통한 알곡이 꽉 들어차 있다. 농업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엔 전 세계의 인구 역시 비례하며 증가한다.

이렇게 식량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용어로 ‘인구부양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금은 식량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도 따져서 인구부양력을 계산하는데, 결국엔 번 돈으로 먹어서 생존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와 관련된 용어로 ‘식량 자급률’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말 그대로 한 국가에서 생산하는 식량의 총량이 인구 전체의 식량 소비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말이다. 식량 자급률 중에서도 곡물을 따로 계산하는 ‘곡물 자급률’도 중요한 개념인데,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고기나 생선 등을 사육하기 위해 들어가는 사료용 곡물이나, 빵, 과자, 국수 등의 가공식품을 만드는 가공용 곡물도 곡물 생산량에 포함시켜 계산한다.

식량 자급률이 높아도 곡물 자급률은 낮을 수 있다. 바로 한국이 그런 상황이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30%대, 곡물 자급률은 23% 안팎이다. 즉 우리가 공급받는 모든 열량의 4분의 1만 자급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기후위기, 전쟁, 국제 정세에 따라 수입 길이 막힌다면 국민들은 4분의 3의 식량을 갑자기 구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농업을 등한시하며 농산물 공급을 수입에 의존했던 국가가 휘청이게 된 사례는 꽤 많고 그 결과는 아주 참혹하다.

밥 한 공기에 300원이라도…

한국전쟁 후 폐허 속,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공산품 수출 중심의 경제체제가 가동되었고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풍요가 찾아왔다. 그 화려한 역사의 그늘에서 농민들은 가장 먼저 희생된 소외 집단이며 그 희생은 현재진행형이다. 1950년대부터 본격 시장 개방을 지향하면서 공산품을 팔기 위해 농산물을 수입해야 했다. 의무로 수입한 농산물 때문에 국산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비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갑자기 빚더미에 올랐다. 농사를 포기하게 되고 농업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의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이촌향도 현상이 뚜렷해졌다.

이렇게 급격하게 농업인구와 농지가 줄어들고 생산량이 들쑥날쑥해지면서 양곡 생산과 공급을 안정화하기 위해 과잉생산분을 나라에서 계획적으로 관리하고 수매하여 비축하거나 시장격리하는 장치도 경제발전 과정 중 자연스럽게 생겼다. 이 전통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양곡관리법’이다. 양곡관리법은 1950년대부터 존재해왔던 아주 오래된 법인 것이다. 다만 그동안은 합리적인 가이드라인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시행되어서 정권마다 그 법 실행의 효과가 너무 차이 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떠안게 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미 시장가격이 폭락한 뒤에 시장격리를 해봐야 한번 폭락한 쌀값은 안정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 회복을 위해 추가적인 예산도 낭비되어 결국 비농민들에게도 세금 부담이 전가되기까지 한다.

선제적, 합리적으로 격리하면 세금도 절감되고 쌀값도 효과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다. 개정안에서 요구하는 부분은 ‘쌀의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수확기 쌀 가격이 평년 대비 5~8% 이상 하락할 시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한다.’는 내용을 기준으로 명확히 하라는 점이다. 농산물은 다른 재화들과 다르게 수요에 비해 아주 약간, 단 1%만 과잉생산 되어도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초과생산 분은 보수적으로 적게 잡는 것이 적절함에도, 심지어 거부권을 남발하는 바람에 원안보다 더 완화된 기준으로 개정안이 변해왔다. 생산비는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고 있는데 쌀값은 30년 전 그대로이기 때문에 농민들은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윤석열은 1호 거부권을 양곡법 개정안에 행사했다. 2024년 12월 19일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는 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농민들은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밥 한 공기에 300원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엄동설한에 아스팔트 위에서 떨며 여전히 거리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다. 마트의 매대가 텅텅 비게 될 날이 얼마 멀지 않은 것 같다.

김후주

청년 여성 농업인

글. 김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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