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사용되는 빌드업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자주 보는 콘텐츠를 통과하는 렌즈로 끼워보았다. 필자 세 명이 각자가 본 최고의 빌드업을 소개한다. 감탄이 나오는 각 분야 최고의 빌드업들.
글. 김윤지‧최재윤‧황소연
'빅 샘'의 일곱 가지 생존전략, 축구 감독 샘 앨러다이스
축구 팬이라면 ‘빌드업’이라는 용어에 익숙할 것이다. 축구에서 빌드업은 공을 상대 골대 앞까지 운반하기 위해 동원되는 선수들의 움직임과 패스의 총체를 의미한다. 빌드업이 없는 축구는 없으며, 모든 축구는 빌드업 축구다. 다만 ‘어떤 빌드업’을 추구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러 빌드업 중 가장 인상 깊게 본 빌드업은 샘 앨러다이스, a.k.a 빅 샘이 구사하는 전술이다.
샘 앨러다이스는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으로, 프리미어리그의 ‘공공재 감독’이라 불린다. 공공재 감독이란, 같은 리그 내에서 여러 클럽을 맡은 감독들을 말한다. 프리미어리그는 강등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중하위권 팀들은 강등 위기에 처하면 이를 해결할 소방수를 찾는다. 그는 데뷔 이래 16시즌 동안 강등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는 볼턴, 웨스트햄, 선덜랜드, 크리스탈팰리스 등 총 아홉 개 팀을 지휘하며 프리미어리그에서 역대 가장 많은 팀을 이끌었다. 비교적 최근 강등을 경험하긴 했지만, 2022~23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에 소방수로 부임하며 여전히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샘 앨러다이스의 전술은 주로 ‘킥 앤 러시(Kick & Rush)’이다. 소위 ‘뻥축구’라 불리는 전통적인 잉글랜드식 축구로, 화려한 패스워크나 최신 전술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롱볼 전술이다. 다소 구시대적이라 볼 수 있는 전술로 강등 위기에 빠진 하위권 팀을 여럿 구해왔다. 어떻게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2017년 9월 스카이 스포츠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쇼에 출연한 앨러다이스 감독은 잔류를 이루는 데 필요한 ‘일곱 가지 생존 전략’을 직접 공개했다.
첫 번째 전략은 무실점이다. 그는 “실점하지 않으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골은 한 골이면 충분하다.”라며 강등권에 있는 팀들은 골 넣는 게 쉽지 않음을 인정한다. 두 번째 전략은 ‘우리 진영에서 공 소유권을 내주지 말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 팀의 전열을 가다듬어야 실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세 번째 전략은 ‘첫 번째 패스는 전방으로 향할 것’이다. 정확히는 가능한 한 빠르게 앞으로 패스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수비가 좋은 팀이어도 한번에 오는 패스를 안정적으로 모두 방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한, 시간을 주는 것은 강팀이 전열을 가다듬을 기회만 제공할 뿐이다. 네 번째 전략은 ‘전환 시 그리고 넉다운 시 이겨라’다. 세컨볼(경합에서 튕겨져 나오는 공)을 강조한 것으로 수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전략은 ‘세트피스’다. 세트피스는 프리킥, 코너킥, 스로인 등 공이 정지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특정 상황을 의미한다. 좋은 세트피스는 우리 팀에겐 무척 익숙하지만, 상대 팀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만든다. 여섯 번째 전략은 ‘상대 팀의 약점을 이용하라’이다. 그는 “유연하지 못한 축구 철학을 고집하는 팀을 상대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런 팀을 상대로는 더 수월하게 경기를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전략은 “마무리 지역에서의 완성도”다. 지금껏 아무리 빌드업을 잘해왔다고 하더라고 결국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지적한다.
앨러다이스의 생존 전략은 단순한 축구 전술을 넘어, 우리가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기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한다. 강등 위기에 처한 팀들은 위축되어 수비적으로 결점을 지니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둘 다 ‘쫄’아 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이 ‘쫄’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허상을 좇을 때 시작된다. 그는 움츠리고 있는 것을 인지상정으로 여긴다. 다만, 그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구시대적이라서 오히려 효율적인 ‘킥 앤 러시’ 전략으로 말이다. 마치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 단 일격을 위해서!’처럼.
앨러다이스의 ‘일곱 가지 생존 전략’을 보고 있자면, 어느덧 그의 전술을 내 인생에 끼워 ‘망한 내 인생,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로 바꿔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를 ‘무리하지 말기’로, 두 번째를 ‘내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로, 세 번째를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다리 찢어진다.’로, 네 번째를 ‘다음 수를 생각할 것’으로, 다섯 번째를 ‘나만의 루틴을 만들 것’으로, 여섯 번째를 ‘똑같은 방식을 고수하지 않을 것’으로, 일곱 번째를 ‘나만의 필살기를 만들 것’으로 바꿔 읽는다.
[참고자료]
<더 믹서: 프리미어리그 역사와 전술의 모든 것>(마이클 콕스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2018)
글. 최재윤
축구 유튜브 채널 <이스타TV>의 ‘번개로드’ 및 동명의 서적 <번개로드 1: 중화요리와 돼지고기> 작가, 맛집 인스타그램 번개로드(@lightning.road)와 ‘아부라소바’ 식당을 기록하는 인스타그램 계정(@ttoburasoba) 운영자.
‘나’에서 ‘우리’, 아이브의 세계관
아이돌 ‘덕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으니 바로 세계관이다. 앞으로 그룹이 나아갈 방향성부터 멤버들 간의 관계성까지 다양한 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은 아이돌 팬들이 덕질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 혹은 팬덤에게 그들만의 세계관을 각인시킨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복잡한 배경지식을 요하는 아이돌 세계관 시장에서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구축된 아이브의 ‘자기애 세계관’은 단연 눈에 띈다. 자기 확신과 주체성을 가진 소녀들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운 아이브는 데뷔 때부터 차근차근 나르시시즘 세계관을 펼쳐왔다. 그 시작점인 데뷔곡 ‘ELEVEN’에서는 “투명한 너와 나의 사이 가만히 들여다보다 일렁인 물결 속으로 더 빠져드는 걸”이라는 가사를 통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감히 누가 이렇게 날 설레게 할 줄”(ELEVEN), “원하면 감히 뛰어들어”(LOVE DIVE), “방금 내가 말한 감정 감히 의심하지 마”(After LIKE). 이후 발표된 ‘LOVE DIVE’, ‘After LIKE’(‘ELEVEN’을 포함하여 ‘감히 3부작’이라고도 불린다.)에서도 ‘나 자신’을 사랑해야만 곧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아이브만의 솔직하고 당찬 사랑 방식을 노래하며 나르시시즘 세계관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었다. “내 앞에 있는 너를 그 눈에 비친 나를 사랑하게 됐거든.”이라는 ‘ELEVEN’ 속 가사야말로 아이브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가사라 할 수 있겠다.

‘나’를 사랑하자는 당당하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적극성 넘치는 사랑의 태도를 노래해온 아이브는 ‘감히 3부작’ 이후 이어진 정규 1집의 타이틀곡 ‘I AM’을 통해 메시지의 확장을 꾀했다. 사랑에 있어 주체적인 모습을 노래해온 아이브는 ‘I AM’을 통해 사랑이 아닌, 주체적인 ‘나’의 삶에 집중했다. “차라리 날아올라 그럼 네가 지나가는 대로 길이거든.”이라는 가사에서 미뤄볼 수 있듯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
데뷔 초부터 ‘자기애’와 ‘주체성’ 등 ‘나’라는 큰 틀 아래서 다양한 음악을 선보여온 아이브는 지난 2월 3일 발매된 앨범 에서 앨범 제목으로 ‘EMPATHY’, ‘공감’을 택하며 한층 확장된 아이덴티티를 보여줬다. 더블 타이틀곡 ‘REBEL HEART’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아이브는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린 따로 이유를 묻지 않고 서로가 필요할 때가 있어.”라고 노래하며 보다 성숙해진 시선과 관점으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아이브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나’, ‘자기애’에서 한 발짝 나아가, ‘우리’, ‘동료애’로 시선을 확장한 당찬 소녀들의 다음 여정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글. 김윤지
매력 없는 드라마야말로 막장, <아내의 유혹>의 은재와 소희
유명한 드라마 중엔 일일드라마가 꼭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일일드라마를 ‘막장’으로 기억한다. 저속하고 외설적인 스토리 라인과 등장인물 설정이 막장이라면, 지난 2008년 11월부터 2009년 5월까지 방영한 <아내의 유혹>은 그 조건에 들어맞는다.

마치 짠 듯이 불륜 행각을 이어가는 애리(김서형)와 교빈(변우민)은 은재(장서희)를 없애버린다. 총 129화에 이르는 <아내의 유혹>은 여기서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내의 유혹> 제목만 아는 이들도 이 드라마를 은재가 눈 옆에 점을 찍고 민소희가 되는 장면으로 기억하지 않나.
은재는 소희로 살아가기 위해 병원에 가서 점을 만들 뿐 아니라(단지 화장품으로 찍어둔 것이 아니었다!) 생손톱을 뽑고 금니를 빼서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을 기억해낼 법한 특징을 없애버린다. ‘어떻게 저걸 속지.’라고 스토리의 허무맹랑함을 지적해도 좋다. 다만 소희를 끝없이 은재라고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의 좌충우돌은 꼭 보았으면 좋겠다. 정체를 숨기려 노력하는 ‘팀 소희’의 빌드업과, 소희를 의심하는 애리가 그것을 뒤엎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는 장면은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 눈을 뗄 수 없다. 거기엔 사랑과 증오, 목숨과 자본이 오간다.

통속성을 비난하면서도 계속 ‘욕하면서 보는’ 시청자들과 격렬한 줄거리는 막장 드라마의 해로움을 설명하는 논리로 동원된다. 나는 애리의 간사함과 교빈의 지질함을 보고 웃는다. 동시에 은재가 소희가 되기를 선택한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재밌다.(사실 아직 이해 못 했다.) 작가님이 왜 교빈이 소희에게 한눈에 반하는 스토리를 만들었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교빈과 애리가 하늘에서 은재와 건우(이재황)를 지켜보는 전설의 짤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 드라마의 빌드업을 곱씹는 나의 방법이다. 매력 없는 드라마야말로 실격이고 막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매력에 생명이 있다면 막장이나 힐링, 어느 스타일의 드라마든 오랫동안 명작으로 불릴 것이다.
글. 황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