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미국보다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라들이 있다. 한 곳은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아온 한국이고, 또 한 곳은 외할아버지가 태어나셨고 내가 대학교 시절에 유학을 간 그리스다. 그 리스 유학 시절, 평생 만난 적이 없던 친척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사람은 엄마의 사촌인 요안나. 어느 누구보다 나를 따뜻 하게 반겨주었다. 요안나 이모 집으로 초대받아 갔을 때 먹은 스파나코피타σπανακόπιτα. 어릴 때 내가 가장 싫어하던 채소는 시금치였는데, 스파나코피타는 시금치에 대한 생각을 백팔십도 바꿔 놓았다. 다른 채소는 다 잘 먹었지만 시금치만큼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스파나코피타는 필로φύλλο(종이처럼 아주 얇게 밀어 만든 마른 반죽) 속에 잘게 썬 시금치와 살짝 짠맛이 나는 페타 치즈, 양파, 달걀 그리고 허브를 넣어 만든 그리스 스타일 페이스티리다. 쉽게 말하면 풍미 있는 시금치 페이스트리. 다른 메제μεζές(스페인 타파스처럼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처럼 뜨겁게 먹어도 되고, 실온과 같은 온도로 먹어도 되는 음식이다. 요안나 이모가 만든 스파나코피타의 속은 부드러웠고 켜 켜이 쌓인 필로의 바삭함은 잊을 수가 없다. 문득문득 요안나 이 모의 스파나코피타가 그립다.

수많은 외국 음식점을 찾아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그리스 음식점은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필로를 구하기 힘들 어서 스파나코피타에 대한 희망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작년에 우연히 그리스 사람이 식당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익선동으로 향했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법한 익선동의 좁은 옛 골목 안쪽 한옥에 자리한 그리스 식당 ‘니코키친’은 내게 또 다른 그리스 같았다. 무거운 한옥 대문 한 짝이 열려 있어 오는 손님을 반기는 듯했다. 한옥의 소박한 정원은 맛있는 그리스 향으로 가득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나오는 니코.
나의 첫 질문은 역시
“혹시 스파나코피타 있나요?”
“오브 코스.”
니코 사장의 이 한마디가 나를 다시 요안나 이모네 식탁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뜨거운 태양, 그 사이에 자리한 하 얀 집들…. 그리스에 살 때 모든 동네엔 타베르나ταβέρνα라고 부르는 식당이 있었다. 고급스러운 그리스 음식이 아닌 동네 주민을 위한 그리스 집밥을 내는 곳이다. 주인이 동네 단골들과 친하게 지내며 잘 대해주는 그런 집. 굳이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학교 수 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같이 메제 한두 접시에 맥주 한잔을 마시 며 수다를 떨기 좋은 곳이다. 그땐 송진 향이 강한 그리스 와인 레 치나ρετσίνα 한 병이 나의 단골 초이스. 아테네의 관광지와 달리 내가 살던 동네는 한적한 주택가여서 외국인이 흔치 않았지만, 단 골이던 타베르나의 주인은 내가 갈 때마다
“야수γεια σου(그리스어로 안녕이란 뜻), 타드!”
하며 언제나 이방인인 나를 반겨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제들을 가져다주곤 했다.
니코키친에 두 번째 간 날이다.
“야수, 타드! 메제 갖다줄게요.”
그리스 옛 동네의 단골 타베르나로 이동한 듯했다. 20여 년이 지났지만 신기하게도 그리스인의 정감 있는 한마디는 나를 뭉클하게 만든다.
“근데 먹기 전에 먼저 우조를 한잔 마셔야지.”
니코의 추천은 그리스 식탁 앞에서 그냥 옳다.
다른 지중해 나라처럼 그리스도 식전주와 식후주가 있다. 대표적인 식전주가 바로 우조Ούζο. 우조는 포도 껍질과 가지 등으로 만드는 증류주이다. 향신료인 아니스의 향이 술에 가득 퍼진다. 독하게 마시려면 물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되고, 아니스 향이 너무 강하다고 느끼거나 독주를 못 마시는 경우엔 물을 타서 마시 기도 한다. 맑은 우조 잔 안에 맑은 물을 조르륵 따르면 마치 그리스의 연금술사가 주문을 외워 마술을 부리듯 투명한 술이 구름처럼 뽀얗게 변한다. 강한 아니스 향에 한 번 취하고, 뽀얀 우조를 바라보며 나의 옛 추억들에 두 번 취한다.

포도잎에 얌전하게 돌돌 말려 하얀 자지키τζατζίκι 소스와 함께 올라온 돌마데스ντολμάδες. 유학 시절 에게해 인근 섬 안에 있는 작은 타베르나의 테라스에 앉아 먹던 그 맛을 지금 난 서울의 종로 한 가운데에서 느끼고 있다. 그야말로 그리스의 전통 맛 그대로다. 돌마데스는 쌀에 다진 고기와 허브의 일종인 딜을 넣어 포도잎 으로 정성스레 한 입 크기로 하나하나 싸서 찐다. 뜨거워도 맛있 고 식어도 맛있으니 그리스인은 돌마데스를 만들 때 한꺼번에 많 이 만들어놓는다. 그리스의 대표 소스 자지키는 요구르트에 올 리브유, 딜, 레몬 등을 넣어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하다. 돌마데스 를 자지키에 찍어서 먹으면 바쁜 서울 삶 속에서 잠시라도 벗어 난 기분이 든다. 하얀 건물에 파란 문, 아름답게 펼쳐진 파라다이 스 같은 에게해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그 당시에 잠 시 경험한 그리스 섬 생활은 워낙 느렸고 편안했기에 내겐 휴식 같은 음식이다.
새해의 첫날 다시 찾은 니코키친에서 유난히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원래 새해엔 생각이 많아지는 법. 한옥에서 그리스 음식을 먹으면 100여 년 전, 그리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던 할아버지와 지금의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