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폭염이 다가왔다. 점심 식사를 하러 사무실 밖으로 나선 순간, 정수리가 탈 듯이 내리쬐는 햇볕이 느껴지자 온갖 고민이 머리를 스 쳤다. 짜증과 곡소리가 가득할 지옥철, 에어컨 사용으로 급상승할 다음 달 전기세, 매년 심각해져가는 지구온난화 등…. 당장이라도 닥 칠 크고 작은 문제가 부유하던 찰나, 또 한 가지 근심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나의 브래지어였다.
한때는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차리는 일종의 예의라 믿었다. 지금처럼 노와이어 브래지어나 브라렛이 출시되지 않았던 당시엔 쇠로 된 와이어가 가슴을 받치는 형태의 브래지어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형태만큼이나 갑갑하기 그지없는 기능성에도 불구하고 외출할 때마다 착용해야 했고, 그러기에 매번 숨이 턱끝까지 차고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브래지어의 고통이 지나간 하루의 끝엔 몸에 빨갛게 남은 쇳자 국, 그리고 만성적인 소화불량만이 남았다.
이렇게 매일 겪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던져지는 비난과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브래지어 착용 유무를 가지고 내기를 하는 남자 사원들, 노브라인 여자 동기를 보며 문란하다고 흉을 보는 여자 사원들을 그려낸 장면이 드라마에 등장할 지경이니 말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드라마는 이 사회의 세태를 반영한다고.
브래지어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최후의 보루인 양 선전하며 쏟아진 니플 패드 상품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다. 무더위에 땀이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그와 함께 흘러내리는 나약한 기능성에, 자극적인 접착 성분이 깨끗하게 제거되지도 않아 온갖 피부병을 유발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해결을 위한 답은 하나였다. 가슴을 가리기 위한 집착을 깔끔히 포기하는 것. 그 후 옷태를 살리고 싶거나 정장을 입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한 날에는 그저 민소매 정도를 속에 받쳐 입고 외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편하고,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건강해졌다.
하지만 폭염으로 무장한 재작년 여름부터는 경우가 달라졌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티셔츠 한 장을 걸친 채 맥주를 사러 집 앞 편의점에 들어선 순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저씨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마치 40년 만에 재회한 이산가족처럼 나의 가슴과 격렬한 대화를 나누는 듯한 그의 시선에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 결국 쫓기듯 물건을 사고 집에 돌아왔으나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왜 내가 숨어야 하는 거야?”
최근 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설리의 말 이 화제였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상태로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업로드하는 그녀에게 많은 이들이 ‘공인의 행동으로 부적절하다’, ‘보기 문란하다’ 등의 지적을 던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액세 서리와 같이 어떤 옷에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녀의 말에 더없이 동의했던 이유는 브래지어가 누군가를 정의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 가슴 또한 내 몸의 한 부분이자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Love yourself.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으로 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저 나답고 편하고 싶을 뿐인 이들의 바람을 향해 ‘문란하다’거나, ‘민망하다’는 지적질을 던지는 행위는 잘못임이 마땅하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몸을 사랑할 권리를 재단할 자격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번 여름의 폭염을 이겨내기 위해 노브라의 습관을 유지하며 당당히 외치기로 했다.
“내 가슴이 어때서!”
Editor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