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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7 컬쳐

각자의 여행서

2019.08.22 | 독일에서 하루 살기

“핸드폰과 노트북을 하루 종일 보지 않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최근 들어 주위의 지인들에게 이 말을 자주 던졌던 나는 주말,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는 지옥의 스케줄로 인해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규칙을 위한 불규칙. 매일 어딘가로 출근을 하고, 취재를 하고, 잡지를 만드는 건 규칙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생활 습관과 몸의 리듬은 더없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독일 하노버로 떠난 이 여정 또한 출장이 목적인지라 금요일 퇴근 후 새벽까지 부랴부랴 짐을 싸고 토요일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이 신경계에 주는 영향은 대단했다. 말 그대로 눈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극한의 피로 속에 촘촘히 짜인 워크숍 일정표를 들여다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어진 단 하루의 자유 시간 동안 그저 와이파이가 빵빵한 호텔에서 온종일 뒹굴까 고민하던 중, 창밖에 짙게 드리운 녹음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깥은 여름이구나. 변화하는 계절을 목격한지도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 탓일까, 여름을 더 가까이서 느끼기 위해 아늑하기만한 침대 위를 냉큼 벗어나 공원으로 향했다.

숙소 바로 맞은편에는 하노버의 신시청사(Neues Rathaus)가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축 양식의 신시청사,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비치는 인공 호수까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배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마쉬공원(Maschpark)에서 거니는 산책은 그야말로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여행 코스였다. 내게 있어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모험이 아닌 휴양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달리 힐 대신 러닝화, 정장 대신 트레이닝팬츠 차림으로 나와 현지인들 사이를 걷다 보니 이곳에 녹아든 느낌이 들어 괜스레 흡족했다.

그들에게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그 말인즉 여기선 내가 원하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떠 한 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춰왔던 한국의 일상에 비해 회사원이든, 학생이든, 여행자든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있는 잠깐의 재미가 반가웠다. 매일 아침 조깅을 하러 나오는 유학생인 척 “할로!”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의 산책으로 몸이 놀랐는지 쉴새 없이 땀이 삐져나왔다.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땀을 식힐 겸 벤치에 걸 터앉은 찰나, 한 무리의 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물가로 뛰어드는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요즘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가 여행자들 사이에 유행 이라던데. 불규칙한 여행자에겐 한 달은 무슨, 하루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고도 걱정 없이 다시 잠에 빠지는 아침, 그저 강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자유 시간, 편의점이나 배달 음식 대신 레스토랑에서 음미하는 느 긋한 식사…. 지구 반대편인 독일 하노버에서 마주한 소소한 게으름은 또 다른 현실로, 행복으로 다가왔다.

슬슬 새어나오는 행복의 기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원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에게 레스토랑의 마지막 테이블을 양보하거나, 마트에서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의 카트를 대신 끌어주거나,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는 등 일상에서 베풀지 못했던 따듯한 마음씨가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최근 들어 왜 좋은 일을 업으로 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이 팍팍해지는걸까 싶어 울적했는데, 그 고민의 답이 여 기에 있었다. 결국 남을 돕는 일도 자신의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그만한 기본 환경이 갖춰져야 가능하다는 정답. 그저 여유를 가졌을 뿐인데 머리까지 맑아진 기분이었다.

간밤에 오아시스에 몸을 적시는 꿈을 꾼 사막의 여행자처럼, 잔인하게도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곱 시간 전의 독일에 있으면서도 일곱 시간 후의 한국을 걱정하는 삶만이 내가 돌아갈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상은 사라졌어도 하나의 결심만은 마음속에 남았다. ‘나만의 규칙을 가져야 한다’는 것. 누군 가가 만든 규칙이 끝내 자신을 파괴 하는 것이라면, 그딴 규칙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불규칙한 삶 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무수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불규칙하지 않은 여행을 떠날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ditor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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