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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9 컬쳐

박준우의 푸드그래피

2019.09.17 | 한여름의 레몬 크림

무례하게 굴고 싶었던건 아니었는데, 다만 날이 너무 덥고 습도가 높았을 뿐이다. 어쩌면 지인들의 SNS 계정으로 올라오는 바캉스 기록들을 보며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약간은 비뚤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 약속 시각을 지키지 못했다. 택시 안에서 문자로 양해를 구하고 약속 장소에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프로젝트 담당자는 덩치가 조금 있고 적지 않아 보이는 나이에도 왠지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의 앞에는 방금 나온 듯한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 두 잔이 놓여 있었는데, 우리가 교통 상황을 주고받은 문자로 예상한 도착 시각에 맞춰 미리 주문한 것 같았다. 아마 내게 어떤 음료를 마시고 싶은지 물었더라면 미안한 마음이 든 내가 자신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테니, 묻지 도 않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료 두 잔을 주문한 듯했다. 그가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취향은 너무나 달랐다.

그는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나에겐 평생 한 번도 주문해본 적 없는 낯선 음료였다. 아마 추운 겨울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겨울에는 왠지 끈적한 설탕이 당긴다. 하지만 이런 더위와 습한 공기 속에서는 캐러멜 마키아토 같은 커피는 당최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달콤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부드러운 유제품의 맛과 달콤한 캐러멜의 조화를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이미 습기로 끈적해진 내 몸에 스스로 질려 있는 상태였기에 달콤한 캐러멜이 어쩐지 목구멍이 아닌 그 위 바깥쪽 피부로 달라붙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담당자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꽤 열심히 설명했는데, 상당히 성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또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자기가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해둔 만큼 자신만의 방식이 확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문한 음료를 마시지 않는 내 모습이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주 내 잔에 눈길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의 배려를 무시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덥고 습한 날의 다디단 음료에는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 크림과 설탕이 잔뜩 든 음식이 지금 내가 느끼는 더위와 습한 공기를 이겨내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마실 거리는 차가운 탄산수다. 20대 후반쯤 파리에서 1년 정도 살아본 경험 때문인지 레몬 향이 감도는 시원한 탄산수 한 잔은 더위를 아주 잠시 잊게 해준다. 파리 시내 그늘진 노천카페에 앉아 초록색 병에 든 탄산수를 몇 개의 얼음과 얇게 썬 레몬 한두 조각을 넣어 가져다주는 잔에 따라 마신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여름은 고작 레몬 띄운 탄산수 한 잔으로는 이겨낼 도리가 없다. 한국의 습도는 프랑스산 탄산수의 기포로는 도저히 닦아낼 수 없는 정도니까.

문득 어릴 때도 한국의 습기가 이렇게까지 심했는지 생각해보았다. 흐릿한 기억일 뿐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장마와 태풍으로 정전이 되고 수재민이 생겨 학교에서 모금 운동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질릴 듯한 습한 공기는 적어도 내 어릴 적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물론 한국의 여름이 습하지 않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식구들이 모여 살던 어린 시절의 집에서 나와 동생은 창가 옆에 펼친 얇은 담요 위로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고 누워 있었고, 증조할머니는 그런 우리에게 부채를 부쳐가며 잠을 재우려 하셨다. 그러다 증조할머니도 덩달아 잠이 쏟아져 당신의 손목에 힘이 빠질 때마다 아파트 분양 광고가 인쇄된 동그란 부채의 단면은 우리 몸에 닿았다 떨어지며 손가락에 말아둔 반창고 떼는 듯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몸과 머릿속으로 장마철 습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 겨우겨우 30분간의 미팅을 끝내고 관련 서류만 받아 들고 카페를 나섰다. 상대방의 말하는 법과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칼같이 매끈하게 떨어짐에도 끈적이는 날씨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택시 안 에어컨은 계속해서 돌아갔지만 창밖의 더위 또한 계속해서 나를 쫓아다녔다. 평소대로라면 다른 일정이 있어 또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무더위 때문인지 강의나 쿠킹 클래스 같은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돈을 벌 기회는 줄었지만, 나름대로 다행인 것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시원하고 또 전혀 습하지 않은 집 안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을 틀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그사이 시원해진 거실로 나와 몸을 닦다 보니 어느새 출출해져 간식이 먹고 싶었다. 재료를 확인하기 위해 열어본 냉장고 안은 춥고 또 메말라 있었다. 칸마다 널브러져 있는 당근이며 셀러리 같은 채소는 수분을 잃어가며 쭈글쭈글해진 얼굴을 내비쳤다. 그런 모습에 수분감 가득 넘치는 이 계절이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하는 데는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과 채소의 신선함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냉장고 과일 칸을 뒤져 말라가고 있는 레몬을 꺼내 즙을 짜고 거기에 달걀과 설탕을 섞어 냄비에 끓였다. 중탕으로 익히면 더 부드러웠겠지만 물까지 끓이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로 냄비에서 대충 저어 레몬 크림을 만들고 워터 크래커의 비닐 포장을 뜯어 함께 밥공기에 담아 들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벽면에 붙여놓은 텔레비전을 켜고 영화 채널을 찾았다. 마침 이야기의 중반 정도에 도달한 프랑스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이 끈적하고 지긋지긋한 여름을 버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에어컨이 돌아가는 집 안에서 이불을 말아 다리 사이에 낀 채 영화를 보며 간식을 먹는 거다. 침대 안으로 파고들어 이불과 한 몸이 된 듯 가만히 누워 과자에 묻은 레몬 크림을 빨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최소한의 안정을 되찾았다.

아마도 나의 일상은 이 계절이 지나기 전까지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불행할 테지만, 에어컨이 돌아가는 방 안 침대 속에서 나만의 파삭하고 끈적이지 않는 안식처를 찾아 버텨내야만 한다.

Writer 박준우

illustrator 린지

Editor 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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