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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09 에세이

에그씨네 커피

2019.09.17 | 여전한 것들에 대한 예찬

내가 연희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특유의 ‘여전함’ 때문이다. 몇몇 가게가 새로 생겼고, 또 몇몇 가게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 연희동이라는 동네에 호감을 갖게 만들었던 온화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오래된 중식당들도 여전하고, 단골 카레집의 카레라이스 맛도 여전하다. 8월이면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도, 골목을 걷다 보면 나타나는 작은 공원의 나무 그늘도, 그곳에 조용히 앉아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그 옆쪽에 연애 시절 아내와 김밥을 한 줄씩 사서 나눠 먹던 벤치도 여전하다. (그 앞에 있던 크루 아상 가게는 어딘가로 옮겨갔지만.)

그리고 흰색으로 칠한 낡은 2층 건물. 16개의 좁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매뉴팩트 커피(MANUFACT COFFEE)’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 연희동에 매뉴팩트가 처음 문을 열 당시부터 난 이곳이 좋았다. 입구에 마주 놓인 한 쌍의 1인용 가죽 소파, 벽을 마주 보는 좁은 바, 벽장을 채운 세계 각국의 원두 봉지, 나무로 투박하게 짠 넓은 테이블,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원두 향까지 모든 게 마치 애당초 이곳에 이대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콘셉트, 좋은 디자인 가구, 세련된 인테리어 소품만으론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느낌적인 느낌, 말 그대로 ‘바이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사하게 꾸민 것도 물론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결코 진정성 있는 것을 대신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플랫 화이트 한 잔요.”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주문하는 커피 또한 여전하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아이스로 주문할 뿐이다. 에 스프레소의 끈적하고 고급스러운 캐러멜색이 천천히 하얀 우유 안으로 스며들면서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무늬 는 마시기 전부터 이미 눈을 황홀하게 한다. 어느 여류 작가의 에세이에서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 라테를 마실 때 일단 한 모금 먼저 마실까, 빨대로 저어서 마실까 고민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라면 아무리 무덥다 해 도 빨대를 휘휘 저어서 이런 근사한 광경을 망쳐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이 라도 더 오래 봐야 마땅하다. (플랫 화이트는 양이 많지 않기에 아껴 마시고 싶기도 하고.)

매뉴팩트의 플랫 화이트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순 있겠지만 나는 매뉴팩트 커피의 특별 함은 그들이 추구하는 단순한 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무쌍한 트렌드나 남녀노소를 불문한 ‘보편적인 맛’, ‘타임리스(timeless) 한 맛’. 우유와 섞일 것을 생각해 원두의 고소한 맛과 단맛이 최대한 살아나도록 볶은 후, 개성이 강하진 않지만 안정성이 장점인 라 마르조코(La Marzocco) 에스프레소 머신을 통해 숙련된 바리스타들이 절묘한 타이밍에 추출해낸다. 이는 바리스타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하게 들리지 않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유니크함’, ‘특별함’ 같은 단어 대신 ‘안정성’과 ‘보편성’ 같은 가치를 좇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매뉴팩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무미건조함 혹은 딱딱함 또한 이곳의 커피를 마셔보면 진지함, 굳건함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연희동 매뉴팩트 커피는 찾는 사람들의 연령대 또한 다양하다. 멋을 한껏 부린 젊은이들이 점령하지 않은 카페, ‘해시태그’나 ‘핫 플레이스’ 라는 단어와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이 카페가 왜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은은하게 멋이 나지만 결코 뽐내지 않는 듯한 느낌의 중년 손님들 이 커피를 앞에 두고 책을 읽는 모습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단 말이다! 바로 이곳에서!)

나는 세상엔 여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오랜 시간 여전할 때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어느 날 우리로부터 그 여전한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버리곤 한다. 어린 시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온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가던 동네 돼지갈빗집은 세련 되고 깔끔한 3층 건물의 대형 식당으로 변해 있고, 넓은 창을 가득 메우는 가로수의 초록빛이 좋아서 자주 가던 조용한 연남동의 카페는 문을 닫았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삶이 우리에게 야박한 탓이다.

그래서 이 삶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나는 오늘도 연희동 길을 걷고, 매뉴팩트 커피로 가기 위해 16개의 작 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오늘도 이 안에 가득한 ‘여전함’들에 한 번 더 안도하 기 때문이다.

Writer·Photographer 스탠딩에그

Editor 손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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