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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20 커버스토리

<작은 아씨들>과 그레타 거윅의 여성 캐릭터들

2020.02.10

어린이 책장의 품격을 높여주던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전집. 문학성을 이해할 만큼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진갈색 하드커버에 금색으로 적힌 표제에선 세계문학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꼈던 책은 소녀들의 영원한 고전 <작은 아씨들>이다. 제목부터 여기엔 나와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여자들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첫째 메그, 글 쓰는 데 소질이 있는 활달한 둘째 조, 조용하고 헌신적인 베스, 당돌한 막내 에이미. 마치가의 네 자매 중에서도 나는 피아노를 잘 치고 몸이 허약한 셋째 베스가 좋았다. 비극적 주인공을 향한 애착과 슬픔. 그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였던 것 같다.


시대에 맞게 변주하는 입체적 캐릭터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캐릭터를 보는 시선도 캐릭터를 향한 애정도 변하게 마련이다. 보호받고 사랑받다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산화하는 것이 어릴 적 동경하던 모습이었다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며 점점 언데이터블(undatable) 우먼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소녀들은 <작은 아씨들>에서 동질감을 느끼거나 이상향을 투영하는 캐릭터를 만난다. 출간된 지 150년이 넘도록 <작은 아씨들>이 사랑받는 이유는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전형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1868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이자 성장소설 <작은 아씨들>은 네 자매의 이야기인 동시에 글 쓰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작은 아씨들>은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20세기에 영화화된 마지막 작품은 질리언 암스트롱 감독이 연출하고 위노나 라이더가 조를 연기한 1994년의 영화다. 21세기엔 그레타 거윅이 <작은 아씨들>의 영화화에 동참한다. 그레타 거윅은 자전적 영화이자 성장 영화인 <레이디 버드>로 감독 데뷔를 한 배우이자 각본가이다. <레이디 버드>를 통해 미국 인디 영화의 반짝이는 샛별에서 할리우드의 스타가 된 그레타 거윅은 자신의 두 번째 영화로 19세기의 소설을 각색하기로 한다. 그레타 거윅의 일관된 관심사가 <작은 아씨들>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에 이 만남엔 의문과 의심이라곤 낄 자리가 없어 보인다.
19세기의 소설을 21세기의 영화로 만들면서 그레타 거윅은 그레타 거윅다운 각색의 묘수를 발휘한다. 각색에 영향을 준 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삶이었다고 한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작가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19세기 미국의 여성이고,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 조는 바로 그런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루이자 메이 올컷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아씨들>의 조는 그렇지 않다. 여성의 결혼과 출산은 그 시대 독자들이 원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레타 거윅은 소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느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이 만든 캐릭터보다 그녀의 실제 삶이 더 진보적이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 원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그레타 거윅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좋아할 만한 엔딩, 원작과 소녀들을 위한 궁극적 해피엔딩"으로 <작은 아씨들>의 21세기화를 꾀한다.
막내 에이미 캐릭터의 부각도 눈에 띈다. 에이미는 조만큼이나 꿈과 사랑에 진취적인 소녀다. 하지만 조, 로리와 이루는 삼각관계 때문에 네 자매 중 가장 독자의 사랑을 덜 받는 캐릭터다. "위대해지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야." 원작 소설에도 나오는 대사처럼 에이미는 야망을 가진 소녀다. 그레타 거윅은 야망으로 가득한 이 19세기의 소녀가 얼마나 멋지냐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고 그것을 행하는 여성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재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에이미가 바로 그런 캐릭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말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는 캐릭터.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그레타 거윅이 창조해낸 전진하는 여성들
시대와 상황이 다를 뿐, 그레타 거윅의 영화에는 언제나 조와 에이미 같은 여성들이 있다. 야망을 좇아 행동하는 여성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여성들. 꿈을 향해 돌진하는 여성들. 고집불통에 막무가내지만 사랑스러운 얼굴들. <레이디 버드>의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을 보자. 크리스틴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스스로가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라 불리길 원하며, 심심하기 그지없는 도시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문화와 예술의 도시 뉴욕에 가고 싶어 한다. '레이디 버드는 뭐고 뉴욕은 또 뭔 소리냐'며 주립대에 들어갈 생각이나 하라는 엄마에게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위하는 소녀가 크리스틴이다. 남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 허황된 꿈이라도 좇고 보겠다는 배짱은 그레타 거윅이 창조한 여성 캐릭터들의 공통된 습성이다. 그레타 거윅을 주목하게 만든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그레타 거윅)는 성공한 현대무용가가 되는 게 꿈이지만 오랫동안 견습생으로만 지내고 있는 스물일곱 살의 뉴요커다. 애인보다 소중한 절친이 떠나고 월세 걱정은 줄어들지 않지만, 프란시스는 솔직한 삶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남이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주구장창 늘어놓는 외곬의 모습이나 뉴욕의 거리를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프란시스의 에너지는 대도시에서의 삶이 주는 외로움과 낭만을 모두 보여주는데, 자존감을 지키며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서도 유쾌하게 이어진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서 그레타 거윅은 서른 살의 뉴요커 브룩을 연기한다. 뉴욕의 새내기 대학생 트레이시(롤라 커크)에겐 성공한 뉴요커일지 몰라도 브룩의 화려함은 허세가 빚은 거품이다. 어쨌건 의붓자매가 될 뻔한 브룩과 트레이시는 성공을 갈망하는 여성들이자, 창피하게 넘어졌다가도 뻔뻔하게 다시 일어설 줄 아는 용기를 지녔다. <프란시스 하>와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서 그레타 거윅은 감독인 노아 바움백과 함께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자신의 경험을 창작의 재료로 삼아 매 작품에서 생동감 넘치는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스토리텔러'로서 그레타 거윅의 행보는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레이디 버드>로 이어지며 만개한다.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그레타 거윅의 여성들은 <작은 아씨들>에서도 웃고 뛰놀며 전진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 조와 화가가 되기 위해 유럽으로 간 에이미에게서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와 브룩의 얼굴이 스치는 건 묘하다. 무엇보다 시얼샤 로넌이 연기하는 조, 엠마 왓슨의 메그, 플로렌스 퓨의 에이미, 엘리자 스캔런의 베스, 거기에 고모 역의 메릴 스트립과 엄마 역의 로라 던까지 이 시대 가장 매력적인 여성 배우들의 앙상블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 <작은 아씨들>의 캐스팅은 그레타 거윅이 우리에게 건네는 또 다른 선물이다.

<프란시스 하>

이주현
<씨네 21> 기자. 씨네필보단 축덕, 밤마다 프리미어리그를 보다
붉게 충혈된 눈 때문에 '영화 보느라 그러신가 봐요'라는 오해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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