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짧았다. 그래서인지 퇴근 후의 시간을 쪼개어 살았다. 다양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온전한 내 시간에 대한 갈증이 올라왔다. 이것은 갈증을 해소하고 나를 재발견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일주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하루를 떠올려보세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나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와주세요.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얼마 전 신청한 ‘스토리디깅클럽’ 워크숍에서 온 문자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소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퇴근길에 본 몸집이 유난히 크고 하얀 구름이었다. 뒤이어 의문이 생겼다. 내가 나를 위해 했던 수많은 일들을 밀어내고, 그저 눈으로 봤던 자연현상이 ‘그날, 그 순간’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봄이 시작될 즈음 나는 퇴근 후의 시간을 잘 활용해 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피곤을 핑계로 하루하루 처져가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자 여러 일들을 계획한 것이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며 저녁밥을 지어 먹고,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으며 근력을 키우고, 날이 선선할 땐 밤 산책을 했다. 비유가 탁월한 문장들을 발견하려 소설을 읽고, 관심 있었던 주제의 매거진을 정기구독하며 지식을 충전했다. 이렇게 나를 위해 시간을 잘 꾸려왔는데, 왜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을까. 이것은 허상이었나. 뭐랄까, 여러 계획들에 할애한 시간이 무용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약간 기운이 빠진 채로 나는 스토리디깅클럽 워크숍에 갔다. 구름을 인정할 수 없어 2, 3순위의 장면들을 여분으로 챙긴 채로. 이날 우리와 함께할 워크숍 스토리텔러는 오은 시인이었다. ‘솔직하게 내 안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자신의 경험담과 찰진 비유들을 재미있게 버무리는 덕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가 꺼내는 이야기 중 마음에 남는 문장들을 기록했다. 그러던 중, “어떤 발견이든 그 안에 내가 들어가 있어요.” 오은 시인의 말이 기록을 넘어 마음에 꽂혔다. 다시 1순위의 순간을 되돌려봤다.
그날은 일주일 중 가장 힘든 날, 하루 꼬박 열 시간을 서서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금요일이었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서 내려 출구로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르고 있는 내 눈에, 늘 보던 풍경이 아닌 다른 것이 비쳤다.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와 상점의 알록달록한 간판들, 그 위로 순백의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설마, 구름?’ 밀도 높은 새하얀 생크림을 하늘에 뿌린 듯했고, 부피는 물론이거니와 어찌나 큰지 온전한 실체가 보이지 않았던 구름. 순간 내 머릿속도 하얘지고, 구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만 생각했다. ‘12층! 집으로 가자!’ 혹여 사라질까 얼른 뛰어 들어가 베란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30여 분을 멍하니, 구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계획했던 일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이 시간만으로 나는 충분했으니까.
돌아보니 이야기 안에 내가 있더라. 그저 보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앞뒤 맥락에 당시 나의 몸 상태와 욕구와 ‘충분하다’는 감상까지, 온전한 내가 있었다. 사실 스토리디깅클럽을 신청한 계기가 있었다. <아무튼, 메모>라는 책을 읽으며 기록했던 문장 하나가 흐릿하게 머릿속을 계속 떠다녔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의 삶이 수동적일수록 능동적인 부분을 늘릴 필요가 있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이 사회와는 조금 다른 시간–고정관념, 효율성,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일들을 하며 나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문장이 자꾸 떠오르는 게 이상했다. 이제야 선명해졌다. ‘고정관념, 효율성, 이해관계와 무관한 자신만의 시간’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려고 한다. 목표, 계획, 실천과 무관하게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내 감정에 충실해지는 시간이 바로 나만의 시간임을. 그리고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스토리디깅클럽을 마친 후, 이를 기획한 필로스토리가 궁금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필로스토리(philostory) 소개
채자영, 김해리 공동 대표가 지역의 이야기, 또 개개인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스토리디렉팅 그룹이다. 다른 색을 가진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따뜻한 이야기 전문가 그룹이자,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전하고 싶을 때 함께하고 싶은 파트너로 회자되고 싶다.
연남동에 오게 된 스토리와 이 동네에 대한 인상
연남동, 연희동 일대에서 지역 콘텐츠를 만드는 ‘어반플레이’의 제안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어반플레이에서는 지역의 이야기가 아카이빙 되는 공간을 원했고,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발굴하는 크리에이터로 ‘기록상점’이라는 공간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한적하고 걷기 좋은 연남동에 머물다 보면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여행에서처럼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곳은 개성을 가진 작은 숍들이 다채롭게 널려 있기도 하다. 그야말로 이야기가 있는 동네가 아닐까.
필로스토리만의 프로젝트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를 함께 발견하고 정리하는 ‘퍼스널 브랜드 스토리 서비스’. 자체 개발한 스토리 툴킷을 활용해 최대 3개월의 긴 호흡으로 내 이야기를 찾아간다. 과정 속에서 개인의 기록들이 쌓이고, 여태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인터뷰 콘텐츠를 통해 모바일 포트폴리오 및 5분 자기소개서가 완성된다.
기록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채자영 기록은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준다. 가끔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무참히 흔들리는 나를 목격한다. 세상에 치여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책상에 앉아 나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기록이다. 왜 그런 감정을 느꼈고,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기록해보는 것이다. 스토리디깅클럽에서 오은 시인이 ‘내가 선명해지는 시간’이라는 언어를 썼는데 이게 참 와 닿았다. 기록은 내가 선명해지는 시간인 것 같다.
김해리 기록은 나를 발견하고 기억하는 방법,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매개다. 일상의 기록이 쌓여 볼륨감이 생겼을 때, 당시에는 몰랐던 의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록을 하면 삶을 자연스럽게 회고하게 된다.
※웹사이트 http://philostory.com
※인스타그램 @girok_mansion
글 박민혜
사진 필로스토리, 어반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