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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1 에세이

국회가 n번방을 말하기까지

2020.07.30 | 제대로 된 법 제정을 기다리며

소라넷과 n번방. 디지털 성범죄는 흔한 오락거리 혹은 몰카라는 변명, 처벌할 근거가 없는 부실한 법과 낮은 형량을 들어 존재 자체로 불법이 아니라고 외쳤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숨어버린 사건들에 국회가 관심을 가진 때는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한 후부터다. 모두가 잠시 여론의 눈치를 본 결과물이 아닌, 내실 있는 ‘n번방 방지법’을 기다리고 있다. 국회 보좌진으로 일했던 최이삭 씨가 ‘n번방 사건’이 끝내 해결되리라 믿는 이유를 말한다. –편집자 주

2018년 6월 9일은 6·13 지방선거 사전 투표가 시작된 날이자 제2차 혜화역 시위가 열린 날이다. 당시 A 국회의원실에서 일하던 나는 아침부터 지역구의 한 전통시장 근처에서 사전 투표를 독려하는 피켓을 목에 걸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선거 전 마지막 주말을 맞아 시장 앞에는 모든 정당 후보자의 유세 총력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유세 차량, 인형 탈을 뒤집어쓴 선거운동원이 주민들의 시선을 빼앗거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며 저마다 당선되면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못 미더운 약속을 했다.

나는 업무를 마치고 서둘러 혜화역으로 향했다.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제1차 시위에 1만여 명(경찰 추산 수치)이나 모인 이유를 빨리 알고 싶었다. 2번 출구로 나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울지 마, 지워줄게. 죽지 마, 지켜줄게. 우리가 싸워줄게.’ ‘우리는 달걀이 아니며, 너희도 바위가 아니다.’ 참가자들이 준비해온 피켓을 읽으며 걷다 보니 최고기온이 30℃에 육박하고 비까지 오는 이 궂은 여름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왜 혜화역에 모였는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으니 사방에서 초콜릿과 비타민 같은 간식을 나눠 줬다. 부산에서 왔다는 옆자리 참가자는 집에서 얼려 온 2리터짜리 생수 병을 건네기도 했다. 큰 덩어리 얼음이 출렁이는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시며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혜화역 시위구나. 선거는 나흘 후인데,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약속한 자치단체장과 지역 의회 의원 등 9000여 명의 지방선거 후보자 중 아직 아무도 당선되지 않았는데, 이곳에 이미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2018년 뜨거운 여름을 치열하게 함께 보냈던 사람들은 당시 집회에서 문제가 된 혐오성 발언과 퍼포먼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내부 비판을 하고 논쟁하며 의미 있는 유산으로 만들었고, 혜화역 시위의 본질을 이어나가 불법 촬영 등 디지털 성범죄 문제, 낙태죄 폐지, 미투 운동, ‘안희정 성폭력 사건’, ‘버닝썬 사건’ 등을 계속 의제화해 제도적, 문화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이것은 사소한 일인가
4·15 총선을 목전에 둔 올해 2월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회가 n번방 사건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n번방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하는 사람이 1월 25일에 20만 명을 넘겼으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경찰청장은 3월 1일 청원에 답변했다.) 다시 비슷한 내용의 국회청원 성립을 이슈화하는 데 대해 당시 나는 무척 회의적이었다. 왜 이렇게 외로워야 할까, 어째서 국민의 절반인 여성이 주 피해자가 되는 사회문제에 대해 입을 여는 것을 여전히 ‘불온하고 사소한 일’로 여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2018년 정치권에서는 선거가 끝난 후에도 시위 참가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들어볼 필요도 있다는 수준의 발언조차 하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 당시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정도만이 혜화역 시위의 의의를 고민하고 부처 차원의 제도적 개선을 약속했을 뿐이다. 불법 촬영 문제를 규탄하며 여성도 국민이라고 외치는 개인적인 참가자들을 불온 단체로 묶으며 ‘페미니즘의 변질’이라거나 ‘남성 혐오 세력’으로만 낙인찍은 보수 언론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주류화된 여론에만 귀를 기울였다. 비굴하고 무책임했다.

그러나 지난 2월 10일 n번방 사건 수사를 촉구하는 국회의 국민동의청원에 동의하는 사람이 10만 명을 넘은 이후, 각 정당 지도부가 n번방 사건 해결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이를 선거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할 것인지 홍보하는 총선 후보들도 있었다. 물론 늘 그랬듯, 이 중 대부분은 책임지지 못할 말이다. 알다시피 n번방 사건 관련 국회동의청원은 청원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어이없이 졸속 처리했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n번방 방지법’이 의결되긴 했으나, 충분한 연구와 논의 없이 일단 통과만 시키고 봤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 공개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범국민적 지지를 얻어 200만 명을 넘겼을 정도로 중대한 현안이기에 21대 국회에서 보다 온전한 법제화를 위한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n번방 사건’을 끌어올린 그때처럼 국회가 변한다고
n번방 사건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낙관은 먼 얘기가 맞다. 5월 30일 개원한 21대 국회는 상임위 지도부 할당 문제로 아직 원 구성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3월 24일 정부의 n번방 관련 청원 통합 답변에서 경찰청장이 “모든 수단을 강구해 영상의 생산 · 유포자는 물론 가담 · 방조한 자도 끝까지 추적해 검거하겠다.”, “국민 요구에 어긋나지 않게 단호히 신상공개 검토하겠다.”라고 약속했지만, ‘모든 수단’까지는 강구하지 못했는지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 8일 현재, 법원이 자의적으로 법리를 계산해 신상공개 결정한 n번방 관련 범죄자는 운영·관리자인 조주빈, 이원호, 강훈, 문형욱, 안승진 5인에 불과하다.

n번방 사건 등 여러 디지털성범죄와 관련해 입법부와 행정부가 세상의 변화를 대충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하는 동안 사법부는 법의 공정한 집행자가 아닌, 배타적 권한을 가진 법의 소유자처럼 굴며 노래방 주인이 서비스 시간 주듯 자기 흥대로 구형을 ‘때리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n번방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아동성폭력 범죄 촬영 영상 사이트 소유자 손정우의 재판을 통해 자신들의 타락과 부정함을 전 세계에 증명하기도 했다.

#RECALL_NTHROOM, ‘n번방을 상기하자’는 해시태그가 SNS에 종종 보이고 있다. 검경의 수사 진척이 예상보다 더디고, 입법으로 사건 해결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제21대 국회의 정상 운영이 늦어지며 사회적 관심이 많이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걱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 여론을 바닥부터 끌어올려 국민 200만 명의 동의를 얻고,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 선결 과제로 만든 우리를. 그리고 그해 여름,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함께 얼음물을 나눠 마셨던 우리를.


글·사진 최이삭
전 국회 보좌진, 자유기고가.
인스타그램 @isak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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