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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2 스페셜

지브리 애니메이션, 여름이 오는 냄새

2020.08.14 | 지브리의 습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여름의 냄새가 난다. 때론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여름의 ‘향기’라고 할 땐 미처 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향기라는 단어는 왠지 정제되고 다듬어진 것들, 깔끔하고 상쾌한 것들만 허락하는 기분이다. 여름이 온 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향기보단 냄새가 필요하다. 장마철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꿉꿉한 습기, 막 깎은 풀과 잡초 더미에서 퍼지는 짓이겨진 풀 비린내, 뜨거운 햇볕에 쪄진 것 같은 옷의 눅눅함, 땀인지 습기인지 구분하기 힘든 진득한 공기의 무게, 해 질 무렵 골목길에 퍼지는 옅은 폭죽 연기, 그리고 하늘이 비구름에 덥힐 즈음 공기를 가득 메우는 장마의 냄새. 축축하고 무거웠다가 후덥지근한가 싶다가 어느새 쨍쨍해지는, 그런 냄새가 주변을 메울 때 비로소 여름이 왔음을 느낀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지브리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생명, 자연, 이른바 생태주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펜을 들기 전부터 숲을 사랑해왔다.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이점은 자연을 그리는 것이다. 숲이 가진 근원적인 힘은 인간의 마음속에도 살아 있다.” 지브리의 대표작인 <천공의 성 라퓨타>(1986)를 시작으로 자연과 문명의 대결을 그린 <원령공주>(1997)까지 부지런히 숲을 그려왔다. 지브리의 시계가 녹음이 사방을 뒤덮어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시간, 여름에 맞춰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름엔 숲만 생명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성장한다. 무릎이 아플 정도로 눈에 띄게 자라는 시간.

<이웃집 토토로>(1988)에서 마당에 심은 도토리 씨앗을 키워내는 사츠키와 메이의 율동은 그저 마법이나 환상적인 힘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만세 삼창에 맞춰 씨앗이 싹을 틔우고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지브리의 꿈이자 바람인 셈이다. 그렇게 여름엔 모든 것이 자란다.

여름의 바다, 지브리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여름을 담아내는 비결이 있다. 하나는 여름처럼 성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지브리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소년, 소녀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하지만 완전히 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래서 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우리를 여름 한가운데로 데리고 간다. 서툴고 어설프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실패들이야말로 청춘의 시간을 더 빛나게 만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브리의 여름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은 1993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가 아닐까 싶다. 바다, 여름이라는 직관적인 키워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정수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있다. 고등학생 시절 청춘 남녀의 풋사랑을 그린 <바다가 들린다>는 지브리 주인공 중에서도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도시에서 전학 온 소녀 리카쿠와 바닷가 마을의 소년 타쿠의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낸 이 작품은 소녀를 좋아하는 마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소년의 회상담으로 진행된다. 시골 소년과 도시 소녀의 첫사랑이라는 스토리 라인은 여느 로맨스물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바다라는 배경과 겹쳐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바다는 무슨 색일까. 파란색이라고 답하는 당신은 바닷가로 휴가를 떠나는 쪽의 사람이다. 바다를 가만히
들여다보시라. 훨씬 깊고 다양한 색을 품고 있다. 사실 바다가 파란색이라고 하는 이미지는 근대에 와 피서지, 휴양지로서 덧씌운 긍정적인 이미지 중 하나다. 중세 시대 상당수 문헌에서 바다는 검은 계열의 색으로 묘사된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바다는 죽음과 밀접한 공포의 대상이자 미지의 존재였던 것이다. 도시에서 온 리카쿠에게 바다는 생소하고 낯선 곳, 금방 떠날 곳, 어쩌면 휴양지라는 감각에 가깝다. 하지만 바닷가에 사는 타쿠에게 바다는 일상의 연장으로서 지루한 장소다. 그래서 리카쿠는 바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타쿠는 바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목인 ‘바다가 들린다’는 누구의 시점일까. 누구에게 바다의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일까. 바다의 소리는 소년 타쿠를 빼고는 모두가 알았던 타쿠의 마음, 리카쿠를 좋아하는 마음의 소리다. ‘바다가 들린다’는 건 도시 소녀 리카쿠의 시점인 셈이다. 동시에 그건 인생의 여름, 그 시절에 듣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듣게 되는 대학생 타쿠의 시점이기도 하다. <바다가 들린다>가 보여주는 청명한 바다는 여름의 아름답고 부끄러운 색을 투명하게 비추는 한편 그 빛깔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세상은 지금, 파랑과 초록
지브리 스튜디오가 여름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또 하나의 비결은 바로 이와 같은 작화에 있다. 지브리의 작품들을 볼 때 여름이 떠오르는 이유는 단순하다. 직관적으로 여름의 색, 여름의 냄새, 여름의 습도를 그림 안에 담아내기 때문이다. 지브리의 작품들은 단지 여름이라는 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것을 넘어 여름의 ‘감각들’을 그려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눈이 되어 50년 동안 지브리의 색을 담당해온 야스다 미치요는 이를 ‘인간에게 상냥한 색’이라고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감각까지 상상하고 채운 색깔. 일본의 높은 습도를 반영한 듯 전반적으로 낮은 채도와 명도 속에서 그림의 부드러운 곡선이 색에 담긴 말투마저 상냥하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지브리를 대표하는 색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초록과 파랑일 것이다. 지브리의 초록은 막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의 꽉 찬 초록이다. 지브리의 파랑은 습기로 꽉 차서 눅눅해져도 쨍쨍한 햇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는 청춘의 파랑이다. 그렇게 숲과 생명을 상징하는 초록과 젊음과 희망으로 물들이는 파랑은 언제나 여름에 머물러 있는 지브리의 시간 감각을 여실히 반영한 채 스크린 위를 넘실댄다.

수많은 지브리의 여름 중에서 개인적으로 하나만 뽑는다면 <귀를 기울이면>(1995)을 고르고 싶다. 중학교 3학년 소녀 시즈쿠의 첫사랑과 꿈에 대한 이야기인 이 작품은 여름방학 동안 일어난 일들을 그린다. 앞서 언급한 청춘의 성장담, 초록과 파랑으로 가득한 작화, 여름을 배경으로 한 계절감 등은 <귀를 기울이면>에도 교본인 양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유독 지브리의 여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언젠가 지나온 나의 여름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중학생 시절 시즈쿠처럼 진로를 고민했고, 시즈쿠처럼
이성에 설렌 적이 있고, 시즈쿠처럼 언덕 위의 도서관을 부지런히 다닌 적이 있다.

<귀를 기울이면>을 다시 볼 때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늦은 밤 하얀 종이 위에 글을 써나가며 새삼 그때를 떠올린다. 도서관 가는 길,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어지럽혔고, 녹음이 우거진 길 사이로 서둘러 자라는 풀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정해진 것 하나 없는 미래가 불안하면서도 내일이 오는 게 막연히 설레던 시절. 모든 게 충만했고 모든 게 막막했으며 그럼에도 모든 게 좋았던 계절. 여름이었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지브리의 여름밤, 해마다 맞이하면서도
매년 그리운 그 매직아워를 추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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