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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32 커버스토리

다만 현재를 산다

2020.08.21 | 배우 박정민 인터뷰

박정민이 책 <쓸 만한 인간>을 냈을 때 인터뷰로 그를 만났었다. 보통 인터뷰 후 원고 쓰기만도 바빠서 별도의 단상을 기록하지 않는데, 그땐 수첩에 이렇게 적어뒀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해준 사람”. 당시 <동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탄 후였는데, 그는 ‘연기를 좋아해서 계속하고 있지만 내가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은지 의문이었다. 수상 후 남들로부터 ‘계속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붙이는 현실주의자. 사는 건 어려운 숙제지만 그중 최선의 답을 찾으려 애쓰는 비관주의자. 박정민은 답변 하나에도 조심스러워했다. 이 말이 누구에게 상처가 되면 어떻게 하지, 그것은 박정민만이 가진 다정함이었다. 고민하다 두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을 때 언뜻 드러난 ‘깐 이마’가 반듯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에서 맡은 역할이 베일에 싸여 있다. 예고편에조차 안 나오더라. 반전을 품은 캐릭터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설명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말하면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조심스러운데. (황)정민이 형이 맡은 ‘인남’이라는 남자가 마지막으로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태국으로 간다. 내가 맡은 ‘유이’는 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인데, 인남을 도와주는 역할이다. 일단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다.(웃음)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는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시나리오와 역할을 알려줬는데, 막상 제안을 주신 감독님은 내가 이걸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반신반의하셨던 거 같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내용도 재밌고, 역할도 내가 언제 이런 역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무엇보다 정민이 형이나 홍원찬 감독님이나 이정재 선배나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만드는 영화니까 하고 싶었다. 늘 정민 형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기도 했다.

홍원찬 감독과는 <오피스>에서, 이정재 배우와는 <사바하>에서 같이 작업했었다. 현장이 낯설진 않았겠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편한 현장이었다. 안면이 있고 평소 친하고 나에게도 잘해주시는 선배들이니까. 하지만 역할이 낯설어서 편하지만은 않은 현장이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한국 영화들의 개봉 시기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 시기에 개봉하는 영화의 배우로서 부담도 있을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극장 상황이 안 좋은데, 관객이 없어서 개봉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영화가 없어서 극장에 더 안 가게 되고. 그런 악순환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영화 <반도>라거나 <다만악>이 앞장서서 극장의 문을 열면 관객분들이 찾아와주시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만악>도 그렇고 다들 잘됐으면 좋겠다. 내가 출연한 영화의 성적보단 한국 영화가 다 같이 잘되고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악>은 촬영 차 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해외에 장기 체류를 하는 시간은 어땠나.
되게 좋았다. 한국에 있으면 촬영 끝나고 숙소에 가도 뭔가 해야 할 일이 계속 있어서 쉰다는 느낌이 없는데 거기선 할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안 했다. 날씨도 따뜻하고 촬영만 끝나면 푹 쉬었다. 잘 쉬면서 일하고 있다는 감각이 좋더라. <시동> 홍보와 겹쳐 한국에 왔다 갔다 해야 했는데 잠깐 한국에 있다가 다시 태국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만의 좋은 경험이 있었나?
특별히 한 건 없고 그냥 길에서 멍하니 있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따뜻한 온도 속에 풀어져 있었던 게 좋았다.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태국에 있다. 자주 못 봤는데 태국에선 자주 보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이렇게 오래 쉰 건 처음 아닌가. 예전에 작품을 안 하고 있을 땐 불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 쉴 땐 되게 좋았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30대 중반이 되면서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왜소하고 등이 굽어 있어서 아프더라. 쉬는 동안 목표를 갖고 운동을 하는 게 보람 있었다. 예전엔 이런 휴식 시간이 굳이 필요하나 싶었는데 가끔 쉬어도 좋겠더라.

합정에 북카페 ‘책과 밤, 낮’을 열지 않았나. 카페보다는 ‘책’에 방점이 찍힌 공간이더라.
책방을 하는 이유는, 거창한 건 없다. 친구와 함께 열었는데 우리 목적은 그저 손님들이 와서 ‘조용히’ 책을 읽고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였다. 사정상 책방에 자주 안 나간다. 내가 빠져 있는 게 공간 취지에 맞는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자주 가면 나를 보러 오시는 분들은 좋겠지만 책방인데 소란스러워진다. 요즘 좀 딜레마다.(웃음) 같이 운영하는 친구나 직원들이랑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자주 가는 게 장기적으로는 책방에 안 좋은 것 같더라. 책방이라는 공간이 책방으로서 힘을 가지려면 내가 빠져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방에 제안하는 개선 방안을 넣는 종이함이라던지 공간에서 여러 아이디어가 묻어나더라. 북카페의 매뉴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밌었겠다.
새롭고 재밌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게 뿌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교착 상태다. 벌여놓고 교착 상태에 있는 거 같다.(웃음) 서점 손님들에게 새로운 걸 제공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없다. 공간을 운영하는 게 쉽지 않더라. 손님들에게 장사하긴 싫으니까. 수익을 위해서 운영하는 거면 힘들 거다. 그런데 손님들이 책 보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추천 도서나 문장 같은 걸 메뉴에 넣은 것을 보고 독서 습관이나 취향을 나누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쓸 만한 인간>에 보면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고 쓴 글도 있다.
책 읽는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것도 자칫하면 꼰대 같아 보일 수 있어 조심스럽다. 영화, 드라마, 예능, 유튜브를 통해서도 사람들은 수많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영상들은 더 쉽고 재미있다. 다만 책이 갖고 있는 장점이 분명히 있고, 나 역시 그걸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책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은, 딱 그 정도의 마음이다. 책이 갖는 단단함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앞으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간 맡았던 인물들이 내용상 주인공이지만, 영화 속에선 소외된 인물들이다. 굳이 나누자면 비주류에 가까운 인물들을 많이 맡았다.
대부분 영화의 주인공들은 약간 소외된 사람들이다. 사람에게 결핍이 있어야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박정민이라는 배우에게 딱 떨어지는 이미지가 없어서 감독님들이 여기도 붙여보고 저기도 붙여보시는 것 같다.

<파수꾼>을 좋아했던 관객은 <사냥의 시간>을 그 소년들의 후일담으로 보기도 한다.
<사냥의 시간>에서 준석(이제훈)이 “너도 같이 가자.”며 무리에 끼워줄 때 상수(박정민)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열등감도 있는데 친구가 나를 불러줘서 좋아하는 느낌이랄까. 그 장면을 얘기해주시는 분들이 간혹 있더라. 역할에 대해 ‘이렇게 연기해야지.’라고 중심을 잡고 연기한 건 아니고. 보통 그렇지 않나? 나만 그런 경험이 있나. 끼고 싶은 집단이 있는데, 비로소 그 집단에 초대받았을 때의 만족감, 그런데 그걸 너무 티내고 싶진 않은 이상한 감정. 감독님이 역할에 대해 ‘정민이가 잘할 수 있는 그런 캐릭터’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상수라는 역할은 걔네랑 같이 놀고 싶은 애라고 생각했다. <파수꾼>을 좋아했던 분들이 그런 장면을 알아봐주시는 것 같다.

반면 <시동>은 코믹한 장면도 많고 희망적인 메시지도 있다. ‘너는 중요한 사람이고 다 잘될 거’라고 자기 주문을 하는 부분이 당신이 쓴 책과도 비슷하더라.
촬영할 때 재밌었던 기억이 강하다. (마)동석이 형이랑도 좋았고. 촬영할 때 많이 웃었다. 얼마 전에 <시동> DVD 코멘터리를 녹음했는데, ‘이 영화 되게 재밌네.’ 싶어서 기분이 좋더라. 그 영화가 좋았던 게, ‘다 무조건 행복해라.’ 하고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진다기보다는 ‘그냥 잘될 거야. 안 되면 어때.’ 그냥 슴슴하게 메시지를 흘리듯이 끝나는 게 좋았다. 보시는 분들이 영화 끝나고 기분 좋게 극장을 나가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쓸 만한 인간>에서 본인이 비관주의자라고 했었다. 좋아한다고 언급한 작가들도 비관주의자들이고.
스스로 엄청난 비관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쓸 만한 인간>이라는 책을 보신 분들은 내가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그런데 책에 쓴 글은 내가 매체에 보여주려고 쓴 글이고.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큰 기대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건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라 쉽게 바뀌지 않더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연기를 보여주는 게 힘들어서 대본 첫 리딩을 괴로워한다고 들었다. 누가 나를 주목하는 것도 힘들어한다고?
본격적이지 않은 데서 연기하는 게 어색하다. 예를 들면 라디오에서 사연을 읽으면서 연기를 한다든지, 영화 홍보를 위해 나간 방송에서 영화 속 한 장면을 연기한다든지 하는, 촬영장 밖에서 연기를 갑자기 보여주는 게 너무 힘들다.

최근 재밌게 본 책이 있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인상 깊게 읽었다. 읽는데 답답하더라. 동물권을 위해 애쓰는 분들의 마음이 예쁘고 좋으면서도 그런 분들이 허우적대고 있고, 환경이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많이 답답하다.

<다만악>에서 선배들이나 감독님이 조언을 해준 게 있다면?
사실 선배님들이나 감독님들이 조언을 잘 하지 않는다. 서로의 배려 같은 거다. 그래도 좋았던 순간은 촬영이 먼저 끝나서 한국에 들어오는데 공항에서 정민 형이 “같이 연기하게 돼서 좋았다.”고 말씀해주셨다. 칭찬에 인색한 분이라, 그 말이 정말 좋았다. 정재 선배님은 나라는 배우를 좋아하시는 느낌이 든다. 도전을 하게끔 해주신다. ‘시나리오를 써봐라,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냐, 이 영화가 너한테 영감을 줄 것 같다.’ 이런 추천도 해주시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감사하다. 내가 뭐라고 선배가 이렇게 좋게 봐주시나 싶어서 감사하다.

영화 연출의 계획은 없나?
원래 영화과를 전공했다. 영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게 내가 영화 연출에 소질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연출에는 전혀 욕심이 없다. 시나리오를 써둔 건 있지만 데뷔하려고 쓴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단편은 한번 작업해보고 싶은데… 아직까진 연기나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름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 있나. 박정민만의 여름 아이템?
겨울보다는 여름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다. 특별히 여름에 하는 게 없는데 그래도 좋아하는 것들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름 하면 떠오르는 건 본가에서 본 풍경이다. 일이 없으면 부모님 댁에 내려가서 지내는데, 앞뒤에 산이 펼쳐져 있다. 부모님 댁 개 집 옆에서 멍하게 그런 풍경을 보고 있었던 게 좋았다. 강아지 이름은 용이와 탄이다.

※배우 박정민님의 더 많은 화보와 인터뷰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 232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송희
사진 오아랑
비주얼디렉터 박지현
헤어 은지(아쥬레)
메이크업 혜진(아쥬레)
스타일리스트 진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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