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친구와 제주를 좀 길게 여행했는데, 이참에 서귀포의 폭포에 가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디앤디파트먼트 제주에서 폭포를 주제로 한 제주 로컬 매거진 <인(iiin)> 여름 호를 발견했다. 숙소에서 그걸 읽으면서 알아보겠다고 다짐하며 사서 돌아왔는데, 폭포 이야기보다 더 꽂힌 코너가 있었으니 ‘할망상담소: 할망에게 고라봅서’였다. 60년 차 부부 한연옥 할머니, 고응옥 할아버지에게 독자들이 ‘사랑’ 에 관한 질문을 하면 엄청난 혜안을 전수해주신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 ‘질문 : 막 연애를 시작해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애정 표현을 잘하는 남자 친구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요. 기억에 오래 남을 선물이나 이벤트가 있을까요? 할머니 : 아직 멀었다고 해라. 처음은 좋지. 나중엔 틀어질 수 있으니까 선물 같은 거 하지 말고. (네게) 주거든 그냥 잘 받으라. 잘 받는 것도 사랑이라.’
이 내용을 발견해서 읽어준 친구도 나도 꼰대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인데, 이런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빨리 넘기기를 할 수 없는 인생에서 얻는 연륜이랄까 지혜라는 것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면 더욱 골이 띵해진다. 유튜브가 이런 곳 중 하나다. 밀레니얼과 Z세대의 분기점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나보다 족히 열 살은 어린 친구들이 유튜브를 이끌고 있는 한편,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채널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요리하는 영상의 댓글을 읽다 보면 지금은 떨어져 살거나 돌아가신 조부모님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동체의 기억을 끌어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소개한다.
De Mi Rancho a Tu Cocina
멕시코 서부 미초아칸 (Michoacán)주의 아리오데로살레스(Ario de Rosales) 마을에 사는 앙헬라 여사 (Doña Angela)는 약 1년 전부터 멕시코의 슈퍼스타가 되셨다. 채널 이름은 (제대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농장에서 당신의 부엌까지’라는 뜻으로, 앙헬라 여사의 판잣집 부엌에서 진행되는 쿠킹 쇼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 대신 온갖 냄비를 올려놓을 수 있는 화덕이 있고, 그 옆에는 바로바로 밀대로 밀어서 토르티야를 만들 수 있는 반죽이 한 더미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앙헬라 여사의 접시와 컵인데, 다소 삭막해 보이는 조촐한 부엌에서 화려한 꽃무늬와 밝은색 용기에 담긴 모든 것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앙헬라 여사의 키친 세트가 출시된다면 불티나게 팔리겠지만, 한편으로 나를 포함한 일부 팬은 조금 슬플 것이다.) 소금은 항상 조금만 넣는다면서 한 주먹씩 넣고, 양파는 도마도 없이 손바닥 위에 올려 썬다. 재료로 자주 등장하는 덕분에 스페인어를 못해도 반복 학습으로 알게 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tomate (토마토), ajo(마늘), cebolla(양파), frijoles(콩), queso(치즈)… 앙헬라 여사가 요리를 마친 후, 매번 한 번씩 맛을 보고 외치는 ‘맛있는(sabroso)’ 도 머릿속에 들어온다.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영상을 촬영하는 앙헬라 여사의 딸들도 영어를 못해서 오직 스페인어로만 진행한다.(유튜브 본사에서 각각 구독자 10만 명과 100만 명 달성을 축하하는 실버 플레이 버튼과 골드 플레이 버튼을 보내줬는데, 멕시코인들에게 보내면서 영어로 된 설명서를 첨부한 것을 본 딸의 표정이 일품이다.) 하지만 영상 업로드 이후에 며칠만 기다리면 앙헬라 여사의 서포터스나 팬들이 자체적으로 자막을 만들어서 올려준다. 앙헬라 여사를 보고 각자의 할머니(abuelita) 를 떠올리는 이들이 꾸린 커뮤니티가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Orsara Recipes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 오르사라디풀리아(Orsara di Puglia)에서 미국 뉴저지로 이주한 1939년생 파스콸레 시아라파(Pasquale Sciarappa) 할아버지가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채널이다. 무려 20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베테랑 유튜버가 등장하는 이 채널의 묘미는 레시피 영상보다는 할아버지의 ‘썰’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식탁에서 와인이 든 잔을 들고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 초등학생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전하는 영상이 거의 ‘명절 할아버지 댁 POV’ 수준이다. “땀 흘리지 않으면 소스는 없다.(No Sweat, No Sauce.)”를 제창하며 토마토소스 90병을 만드는 영상에서는 옛날에는 다들 토마토를 각자 농장에서 따서 머리에 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한다. 젊은 시절 오르사라의 농장에서 일하는 사진을 같이 보여주자 살아 있는 역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다 만든 소스를 병에 담아 상자에 넣은 뒤 아기처럼 담요를 씌워주고는(뜨거운 온도를 유지하면서 숙성시키면 더 맛있다고 한다) 그 위에 뽀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땀 흘리지 않으면 소스는 없다.’는 말이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할아버지가 1세대 이주민이라 이탈리아 악센트가 매우 심하고 중간중간 이탈리아어도 섞어 써서 나름 미국 미디어를 통해서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발음에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나도 알아듣기가 힘들다. 근데 촬영하는 자제분들도 어려움을 겪는 것 같으니 영상을 즐기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끔 할아버지한테 ‘우스터소스’나 ‘이스트 효모’ 같은 단어를 발음하게 하는 영상이 올라오는데, 근래 거의 처음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물개 박수를 치며 웃지 않았나 싶다. 기름에 넣은 마늘이 조금씩 움직이면 본인도 춤을 추는 시아라파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주방은 언제나 반짝반짝 정갈하고, 할아버지는 1년 전에도 자선 모금을 위해 걷기 대회에 나가실 만큼 정정하다. 늘 건강하세요.
Momma Cherri
마마 셰리라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샤리타 존스(Charita Jones)는 영국 브라이튼(Brighton)에서 미국 남부식 소울 푸드 레스토랑을 운영했었다. 2005년 존스는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원형 격인 고든 램지의 <키친 나이트메어> 시즌 2에 출연했고, 램지가 거의 최초로 접시를 깨끗이 비우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한 가게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일처럼, 존스는 방송 이후에 갑작스레 찾아온 각종 언론의 주목과 식당에 몰려든 사람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레스토랑 사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에 다시 새로운 식당을 차리는 등 계속 노력은 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모든 식당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존스가 방송에서 주목받게 된 이유는 음식 솜씨뿐만 아니라 긍정적이고 밝은 태도 덕분이었는데, 유튜브 채널을 진행하기에 매우 적절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녀의 삶 또한 매우 놀랍다. 존스는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에서 굶는 사람이 없도록 도와주면서 요리를 배웠고, 교회 성가대를 통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 후 딸을 둘 낳았지만 이혼하고, 수양 자녀를 30명 정도 두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자가격리 중 소년 구독자와 화상으로 통화하면서 함께 요리하는 영상도 업로드했다. 유튜브를 오래 보다 보면 각종 채널의 융성과 쇠퇴를 목격하며 시니컬해지게 마련인데, 이런 사람은 진짜 사랑이 넘쳐서 랜선을 타고 구독자들에게도 가 닿을 수도 있구나 싶다.
글·사진제공 문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