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문화 예술계에 ‘미투(Me Too)’ 운동이 퍼지며 사진계에서 암암리에 자행됐던 비공개 촬영회와 모델 성적 대상화 등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옥토는 가장 덜 유해한, 무해에 가까운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작년 발표한 사진 연작 ‘What we came through’는 그 결과물이다. 그뿐 아니다. 차갑고 부서질 것 같은 자신의 세계를 포착하던 그는 동료 여성 예술가들과 협업해 영상 작업물들을 발표하고 있다. 새해에도 이어질 이옥토의 자유로운 몸짓은 연대자 모두가 살아 있다는 증표가 되어줄 거다.
이옥토라는 이름은 본명인가요. 이름이 특이해서 사람들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가명 같은 이름이죠?(웃음) 실명이고 ‘비옥할 옥’에 ‘흙 토’를 써서 비옥한 땅이라는 뜻이에요. 뭘 심어도 열매를 잘 맺으라는 뜻을 담아서 부모님이 지어주셨죠. 이름이 특이하다 보니까 활동할 때 본명이 뭐냐고 물어보는 분이 많고, 잘 잊히지 않는 것 같아요. 죄를 안 짓고 살려고 엄청나게 노력합니다.(웃음)
사진이 생업인데, 코로나19로 어려움은 없었어요?
요새는 이 사태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코로나 사태 초반이던 작년 3~4월엔 저를 포함한 많은 프리랜서들이 일을 구하기 힘들었어요. 벌이가 고작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죠. 저는 2016년부터 사진을 업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건 처음이었어요. 그러다 8월 이후에 이 상황에 어떤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일이 다시 들어오고 있어요. 다행이에요.
최근 새 작업 ‘What we came through’를 발표했어요. 얇은 비닐에 감싼 신체, 눈과 허리의 클로즈업 같은 사진들로 구성되는데 언택트, 비대면의 시대에 인간의 신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저는 사진을 여러 방면으로 활용하는데 그중 하나가 기억의 아웃소싱이에요. 많은 기억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찾아봐야 할 때를 위해 기록하는 거죠. 매거진 <보스토크>에서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는 사진작가들의 작업을 남기고 싶다는 청탁을 받았는데, 많이 지쳐 있던 때였어요. 슬픔의 지속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쳐가더라고요. 어떻게 추동해 사진을 찍어야 하나 싶어서 그동안 제가 사진을 사용해온 방식으로 돌아가봤어요. 언택트 시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신체를 조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본인의 몸을 피사체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선 이 시대에 모델을 콘택트하고 작업을 시도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해가 될 수 있다고 느꼈어요. 감염 문제도 있지만 이 작업 자체가 타인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저 역시 많은 사진가에게 찍혀본 경험이 있어서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생기는 위계에 대해 알아요. 어떤 건 폭력적이고 어떤 건 그렇지 않았는데 이 작업에선 높낮이가 없는 채로 이야기를 하고 싶더군요.
고립된 갑갑한 신체를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젖은 천을 활용했어요. 코로나19 시국에서 n번방 사건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사건, ‘웰컴 투 비디오’의 손정우 사건이 함께 지나갔잖아요.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력감이 커지면서 충격적인 뉴스들을 쉽게 외면하게 되더라고요. 스스로 이런 사건에 굉장히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피로감에 익숙해진 거죠. 고통스러워도 눈을 뜨고 바라보게 되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구상했어요.
사진과 함께 발표한 글에서 어릴 때 천식을 앓았던 일, 약한 소화기관과 관절의 통증에 대해 언급했어요. 옥토 님의 사진에서 종종 소외된 자리를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읽히는데 신체의 병이 세상을 더 예민하게 보는 이유가 됐나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상한 냄새나 길거리에서 들리는 큰 소리의 욕설 같은 것에도 유난히 큰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더 어릴 땐 감당하지 못하고 해석하지도 못했어요. 사진이 제게 기록 매체이자 말하는 도구가 되면서 이런 예민함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나중에 사진을 보고 자각하게 되고요. 그래서 책을 낼 때도 몸과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따로 만들었죠.
이제까지 기억을 갈무리해둔 작업물을 다시 꺼내 보고 변화를 자각한 적도 있을까요.
2019년에 전시회를 했는데, 전시 작품을 준비할 때 엄청난 무력감에 시달렸어요. 2018년에서 2019년 사이에 제가 20대 초반에 겪은 성추행 사건에 대해 고소 고발을 했거든요. 절대 중도에 포기하거나 내 삶을 스스로 끝내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친구들과 약속하고 시작했는데도 너무 힘든 거예요. 동시에 아무것도 찍고 싶지 않아져서 두려웠고요. 당시엔 왜 찍는지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찍었어요. 나중에 전시 제안이 들어와서 보여드릴 만한 사진은 없고 그냥 찍은 거밖에 없다고 했더니 큐레이터가 그거라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사진을 정리하는데 그제야 그때 이 사진들을 왜 찍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가진 맹점들이 보였고요.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혼자라고 느끼고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제 무의식이 사진에서 보였어요.
‘Translucent’ 시리즈도 멋져요. 꽃잎의 섬세한 질감, 파도가 부서지는 모양, 빛을 반사하는 유리병 등을 찍었는데 이 사진들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표면이 넓으면 닿는 양이 많잖아요. 근데 지난해엔 모든 걸 견디기 어려워서 마음을 작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모래알이 신발 밑창에 끼듯이 제가 마음을 작게 뭉쳐야 깨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모든 걸 미시적으로 보게 되고 작은 것만 찍었죠. 바다를 크게 찍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고 물방울이 튀는 걸 클로즈업으로 찍는 식으로요.
요즘의 마음 상태는 어때요?
심리 치료를 계속 받았고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요새는 전 한숨 돌렸으니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서 영상 작업을 통해 다른 여성 작업자들과 협업을 시도해요. 시인 나혜 님, 배우 최정아 님과 시를 영상화하고 있죠. 여성 작업자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많이 봤고, 저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잖아요. 같이 재밌는 걸 하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영상 <스지와 흰>은 나혜 시인의 동명 시 사용을 허락받고 만들었고, <더 큰 숲>은 다음 시 페스티벌에서 의뢰가 들어왔어요. 미공개 시 관련 영상이 있으면 최초로 공개하는 게 어떠냐고요. 하지만 제가 작품을 쟁여놓지 않는 사람이라서(웃음) 이번 기회에 만들자 싶어서 <더 큰 숲>을 만들었죠. 돈을 받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이게 또 일이 돼서 좋아요.
사진뿐 아니라 글도 쓰잖아요. 3년 전 출간한 사진 에세이 <사랑하는, 겉들>에 아름다운 문장이 많더라고요. 평소에 글을 자주 쓰나요.
원래 책을 많이 읽는데 책이 나오기 전엔 시 수업을 들었어요. 저처럼 글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에세이를 쓰는 건 예의 없는 일 같았거든요. 조금이나마 당당하고 싶어서 최대한 시간을 들여 공부했어요. 요즘은 가끔 원고 청탁이 들어올 때를 대비해 메모를 남겨놓고 있어요. 단상이 떠오르면 기록해놔야지, 안 그러면 다 잊어버려요.(웃음)
메모한 단상 중에서 한 가지만 공개해줄 수 있나요.
앗, 잠시만요. 이런 게 있네요.
중·고등학생 때 사뒀던 CD의 대부분은 당시 아기나 다름없던 막내가 형광펜으로 낙서하거나 침을 흘려서 트랙이 중간중간 튄다. 그때는 너무 속상해서 울었는데 지금은 왜 다 소중하게 느껴질까.
책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돕고 싶고 사랑하는 순간을 채집하고 싶다.’고 썼죠. 작가님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어떤 건가요.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름다움은 해를 끼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인 것 같아요. 사진 찍을 때 언제나 가장 주의하는 부분이에요. 일로 누군가를 모델 삼아 찍을 때 그 사람의 몸이 불편하지 않은 게 우선이고 나중에 그 사진이 부끄럽지 않아야 해요. 사진이 약점이 될 수 있잖아요. 디지털 사회라 쉽게 유포될 염려가 있죠. 하지만 어릴 때 사진을 뒤적이면 우스꽝스럽지만 부끄럽진 않잖아요. 잠든 아기나 웃는 노인을 담은 사진처럼 부끄럽지 않고 해가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 되기를 바라며 찍어요.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내가 이 사람에게, 이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 동시에 자유로운 상태인 것 같아요.
글 양수복
사진제공 이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