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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2 인터뷰

은희, 일기장, 그리고 파스타들

2021.01.27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요즘 많이 춥네요. 눈도 내려 정말 겨울 같아요. 저는 캐럴을 찾아서 듣지는 않아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늘 이맘때면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밖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왔지요. 그런데 올해는 집에만 있다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어요.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반복해서 찾아오는 겨울이지만, 늘 그랬듯이 지난겨울과는 또 많이 다르네요. 모든 일은 반드시 필요해서, 그리고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아요. 눈 내리는 것만 봐도 그래요. 물리법칙에 따라 눈 결정은 여섯 개의 꼭짓점이 있는 육각형 대칭 구조를 이루지만, 세상에 똑같은 모양의 눈 결정은 없대요. 그렇게 많이 만들어지는데도, 구름을 지나며, 온도와 습도의 우연한 변화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오늘은 겨울에 태어난, 첫눈 소식은 꼭 나누고 싶은, 친구 은희의 생일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났지만, 왠지 꼭 그래야만 했을 것 같아요. 제가 과거를 반복하며 방황할 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어떤 기대나 불안, 슬픔도 아닌, 순간순간 달라지면서도 확실한 사랑을 계속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덕에서 눈덩이를 굴리듯이 잔뜩 불린 마음을 담은 선물을 들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1
은희


우리의 추억 송이는 유독 겨울에 많이 내린 것 같아. 내가 은희 너네 집에서 새벽까지 놀다가 잠깐 눈을 붙였을 때, 누운 자리에 난방이 잘 되지 않아서 얼어 죽을 뻔했던 날 기억해? 겨울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지. 겨울은 우리가 처음 만난 계절이기도 하고. 아 참, 생일 축하해!
그랬지, 그랬었지.(웃음) 난 추운 게 싫은데, 하필 추울 때 태어났네. 축하를 못 받으면 생일이 더 춥게 느껴지잖아. 그래도 덕분에 오늘은 따뜻하다, 고마워.
나는 여름을 가장 좋아해. 어릴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보통 해 지면 집에 들어가잖아. 오후 예닐곱 시만 되어도 그때에는 무척 늦은 시간처럼 느껴졌고,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근데 나는 외동인 데다 부모님이 늦게까지 일하셔서 집에 들어갈 때 거실 불을 내가 켜야 했어. 그게 너무 싫은 거야. 여름에는 해가 더 오래 머물러서 조금이라도 더 밖에서 놀 수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여름을 좋아했던 것 같아. 지금도 몸을 잘 쓰고 활발한 내 성격과 맞물려서 여름에 기운이 더 나는 것 같아.

‘겨울에 짓는 집은 더운 집 짓고 여름에 짓는 집은 서늘한 집 짓는다.’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대로 겪어내고 바라는 대로 사는 것 같아. 언젠가 네가 스스로를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아이’라고 소개했던 게 생각난다.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나’들끼리 서로 친하지는 않아. 어떤 나는 다른 나를 미워하기도 하고, 이런 나는 저런 나를 감추고 싶어 하거나 저런 나는 이런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기도 하고.
요즘의 나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람인 것 같아. 도망가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에는 돌아오는 신축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 나, 나와 타인, 모든 관계에 해당돼.

2
일기


네게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야?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믿는 어떤 세계관과 체계가 무너진다면… 꼭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도 관계에서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들이 떠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무서워. 나는 ‘지속 가능’과 ‘한결같음’에서 커다란 사랑을 느끼거든.
누군가 내게 어떤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나는 일기장이라고 답했어. 내 모든 시간과 관계, 가치관이나 믿음, 사랑이 다 기록되어 있으니까. 가장 소중한 걸 잃는 것이 가장 두려울 수도 있겠네.

나는 소중한 무언가의 의미를 잊거나 잃기 두려워서 아예 몸에 새기기도 했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도 내 몸의 일부 같아. 매우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늘 관리하고 살피고 필요한 부분을 채워줘야 하니까. 내가 꾸준하지 못해서 게을러지기도 하지만.(웃음) 그래서 더 집에 살림살이 같은 것들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 내가 춤을 추거나 연기를 할 때, 인테리어나 살림을 할 때, 잔 움직임들보다는 딱 본질에만 충실하고 싶어.

은희네 집에 자주 놀러 왔지만 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지 방에 들어가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
내가 거실에서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 식탁에서 밥 먹고 영화를 본다든지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춤추거나 친구와 통화하기도 하고, 연기 영상 같은 것도 찍으면서. 거실이 동적인 공간이라면 내 방은 나를 정적으로 만드는 공간인 것 같아. 방의 조명이 상대적으로 더 어두워서 그만큼 비밀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어설피 아는 사람들은 내가 거실에 있을 때처럼 마냥 활발한 부분을 많이 보겠지만, 사실 난 아예 거실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우울할 때도 있어. 그건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은밀한 모습이야. 내 집의 공간성으로도 내가 맺은 관계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

너를 알기 전에는 이태원이라는 동네에 와본 적이 없었어. 세상에, 편의점에서 시가를 팔더라! 내게는 낯설기만 했던 곳인데 너와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익숙해진 동네이기도 해.
여기가 한남동인데,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 동네에 살았어. 근데 왜 아직도 같은 동네에서 자취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한남동이 너무 좋아서 그래! 다양한 문화가 자연스레 녹아 있는 것도 흥미롭고, 재미난 공간이나 예술가도 많거든. 심지어 외국 같기도 해. 내게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동네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여기 사는 외국 사람들은 타지에 와서 이곳에 머물거나 정착하려는 사람들이잖아. 나도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을 떠나서 서울에 정착하려는 사람이고. 이런 부분에서 오는 유대감도 있나 봐.

이 집에 느끼는 유대감도 각별하지? 네가 처음 자취를 시작한 집이라고 알고 있어. 그런데 우리가 알고 지낸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줄곧 이곳에 살고 있잖아.
집을 구할 때, 인터넷에서 이곳을 발견하고는 너무 괜찮아 보여서 경쟁률이 높을 거라고 예상했지. 그래서 처음 집을 보러 갈 때, 아예 현금 10만 원을 준비해 가서 가계약을 했어. 공간이 넓고 구조도 마음에 드는 데다 위치까지 좋았어. 그런데 첫인상은 온통 진한 하늘색으로 뒤덮인, 말 그대로 옛날 집이었지. 공간은 좋은데 내 감성과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할까?(웃음) 페인트칠부터 전부 다시 해서 조금씩 고쳐왔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2주 이상 집을 비운 적이 없어. 익숙해지고 정이 든 것 같아. 집에 대한 책임감도 강해졌고. 집주인이 집 관리를 나한테 다 맡기거든. 이걸 내가 어떻게 하나 싶었던 일들을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다 해내고 있어.

집에 넘치도록 있는 것과 반대로 없어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얼까.
넘치는 건 없어. 한때는 꾸미는 걸 엄청 좋아해서 스카프나 모자, 선글라스, 주얼리 같은 것들이 되게 많았는데, 이제는 실용적이고 오래 쓸 수 있는 것들이 좋고, 내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그래서 옷 정리도 계절마다 하고, 많은 걸 덜어냈어. 그런데 과하게 덜어냈나, 겨울옷이 하도 없어서… 조금 아쉽네.(웃음)

덜어내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는 거야?
2019년 3월 즈음이었던 것 같아. 좋아하는 유튜버가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이라는 책을 소개해서 읽어봤거든. 이 책을 읽은 뒤 평소 어렴풋이 생각하던 게 명확해졌어. 좋아하는 문장을 인용하자면 이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의 결핍이 아니라 건강이나 아름다움, 부유함, 무엇을 좇든지 완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가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지. 내가 쓰지 않는 물건들을 나누고, 남에게 도움을 주고, 이 땅에 오래 머물 것 같지 않은 사람처럼 생활과 삶을 영위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내게 우아하게 다가왔어.

3
그리고 파스타들


내게도 많이 나누고 도움을 줬지. 특히 우리가 나눈 말이나 네가 해주는 파스타가 종종 생각나.
누군가에게 요리를 대접할 때 파스타를 가장 자주 하는 것 같아. 음식을 대접하고 나누는 일들이 내가 보아온 우리 엄마의 모습이라서 그런지 내 일부처럼 익숙하거든. 그게 내게 사랑의 표현이고,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인 것 같아. 요리를 해서 사진을 찍고 식전 기도를 한 뒤 먹기 직전의 그 순간! 그 기대감을 느끼는 찰나가 요즘 내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야. 물론 음식이 맛없으면 슬프지만.(웃음) 이렇게 섞으면 어떨까, 저렇게 섞으면 어떤 맛이 날까 하고 궁리하는 게 재밌어.

은희 하면 파스타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오늘은 문득 체스보드 위의 ‘퀸’ 같다는 생각을 했어. 체스 게임에서는 기물마다 각각 역할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는데, 유일하게 퀸만 모든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움직일 수 있잖아. 은희 너는 스스로 정한 어떠한 규칙 속에서 가장 자유롭게 사는 사람 같아서.
신기하게도 네가 나를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 같아. 나도 오늘 대화하면서 느꼈는데, 정해진 규칙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그 안에서의 자유로움은 상대적인 거잖아. 나는 절대적인 신념 같은 것들을 항상 생각하는데, 동시에 상대적인 것들도 많이 추구하는 사람이거든. 아까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네가 짚어주니 재밌네. 네가 날 모르면 누가 날 알겠니.


조은식
사진 이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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