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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2 스페셜

팬데믹의 중심에서 퇴사를 외치다

2021.01.20 | 일터의 번아웃에 대하여

휴, 귤, ki, 그리고 기자까지 네 사람이 채팅방에 모였다. 이들은 당신 주변 사람이거나 당신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정신적·신체적 탈진을 경험한 이들의 노동은 촘촘하게 연결됐다. 불확실성이 팽배한 팬데믹 상황에서 이들은 퇴사를 선택하며 번아웃은 ‘돌연변이’가 아님을, 필연적으로 탄생한 것임을 웅변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노동환경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빅> 번아웃을 이야기하기 전, 서로 알아가기 위해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초반으로 시민단체에서 일하다 고민 끝에 12월 초에 퇴사했습니다. 야근이 잦고 주말에도 일과 일상이 잘 구분되지 않는 데다 늘 일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했어요. 퇴사 직전에는 스트레스를 워낙 심하게 받아서 심장이 아픈 증상이 나타날 정도였죠. 진심으로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해야 하니까 하고 있더라고요.
저도 30대 초반이고, 홍보·언론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조직의 ‘고인 물’화로 인한 일 미루기, 꼰대 중심 문화로 인한 부당함 등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았고, 특히 일부 4050세대의 행동에 ‘현타’를 많이 느꼈어요. 업무도 과중했고요.
ki 저는 현재 다니는 회사에 근무한 지 6년 차에 접어들었고, 나이는 20대 후반입니다. 퇴사나 이직을 고민하고 있어요. 비영리 조직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해요. 일하는 과정에서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일이 잦아요. 그런데 번아웃을 해소할 조직 차원의 해결 방안은 없더군요. 연차가 남아도 쓰질 못해요.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몰아세울 때도 있어요. 일 이전에 저 자신이 생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빅> 오늘 하루, 혹은 지난 시간 ‘일하는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어느 정도 소진되고 또 회복되었다고 느끼는지 이야기해주세요.
ki 저는 평소 회사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인간이라 밤낮없이 일할 때가 많은데, 이번 주에는 업무에서 좀 멀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렵더라도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하고, 초과근무를 하게 되면 그만큼 쉬려고 하고요. 그랬더니 요상하게 긴장이 풀리는 게 아니라 기운이 쭉 빠지는 거예요. 돌아보니 제가 일을 대하는 태도를 좀 반성할 필요가 있더라고요. 일을 바쁘게 할 때 생산적이라는 생각에 기분도 자연스레 좋아지고요. 일을 열심히(?) 안 하니까 쓸모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라 썩 유쾌하진 않았어요. 일 말고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으면 큰일 나겠구나 싶어요.
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하루하루 힘들어 화나고 눈물이 났는데 퇴사하기로 결정한 후엔 뭘 할지 정하고 나가는 게 아닌데도 마음이 편하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면 그 조직을 벗어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i 퇴사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속이 시원하긴 하더라고요. 귤 님이 고통스럽지 않게 일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만둘 때 현재 내 상태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회사 일정에 맞춰 퇴사 여부를 결정해야 해서 힘들었어요. 몇 년을 일했는데 그만둘 때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좀 버거웠던 것 같아요. 막판에 너무 힘들어서 말도 없이 일만 하다가 퇴사했어요. 그래도 일과 멀어지니 다시 조금씩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빅>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이라는 표현이 업무 스트레스도 내가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아요. 회사 책임인데 현실에서는 개인의 문제로 여기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업무 스트레스를 부딪쳐 해결하려고 제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그런데 직장 생활 4년
차인 지금은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요. 조직의 문제가 고쳐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제 선에서 관리할 수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 같은 걸 느껴요.
ki 너무 슬프고 공감돼요. 저는 번아웃이 올 때마다 ‘근데 내가 뭘 했다고…?’ 하면서 자책했거든요. 그래서 번아웃을 떠올리면 죄책감이 먼저 드는 것 같아요. 제가 일하는 곳은 업무 강도가 극악이거든요. 거의 24시간 일하다시피 하는 상사들을 보고 그 상사들 밑에서 일하다 보니까, 나는 저런 강도로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웬 엄살이지 싶을 때가 있어요.
귤 님 말씀처럼 저도 조직의 문제를 혼자만 외치는 것 같았고, ki 님 말씀처럼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지.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은 거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ki 맞아요! 조직 차원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걸 알면서 마음은 개인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왜 다른 사람의 업무 강도와 비교하면서 버틸 만하다고 스스로 다독여야 할까요. 사실 내가 힘들면 힘든 건데 직장 분위기 때문에 ki 님 더 힘드셨을 것 같아요.

<빅> 내가 번아웃에 빠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을 짧게 회상해볼까요.
ki 일하다가 사람들이 저한테 뭘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그게 너무 귀찮고 싫고 화가 났어요. 원래 사람
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도 저를 찾으면 숨어버리고 싶고요. 번아웃이 오면 저는 일단 심장이 조이면서 숨도 잘 안 쉬어지더라고요. 왠지 다들 뭔지 아실 것 같아요.
별일 아닌데 화가 나고 울컥할 때가 있었어요. 일단 잠을 잘 못 잤고, 심장의 통증이 자주 느껴졌고요.
저는 감정이 오래가지 않는 편인데도, 며칠 동안 출근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차라리 저 차에 치여서 회사 안 가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었어요. 스트레스성 위염 등이 생기면서 배 속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낄 때도 있었고요.

<빅>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상황에 퇴사를 결심하거나 고민하는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ki 팬데믹 속에서 제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직장이란 게 고정적인 게 아니구나.’ 싶고. 다음 직장은 좀 더 변수에 유연한, 살아남기 쉬운 곳으로 가고 싶어요.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기가 어려웠어요. 작은 일도 무척 버겁게 느껴지더라고요. 퇴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종합 심리검사를 받았는데 결과가 생각보다 나쁘게 나왔어요. 상담사가 휴직을 권하더라고요. 그게 위로가 된 것 같아요. ‘쉬어도 되는구나.’ 싶었죠.
저도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약 없이 견디기엔 저 자신이 망가질 것 같았습니다.

<빅> 자신의 번아웃을 누군가와 나누거나 다른 사람의 번아웃을 알아챈 경험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ki 직장 후배 중에 일하면서 감정 표현을 되게 잘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후배가 어느 때부터 좋다거나 싫다는 표현을 안 하고 조직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을 때,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을 때? 그리고 밤늦도록 퀭한 눈으로 거북목이 되어 모니터만 볼 때… 알아차렸던 것 같아요.
서로 의지하는 동료들이 있어서 번아웃이 오는 순간을 같이 나누고 변화를 도모하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더라고요. 동료 중에 굉장히 밝은 사람이 있었는데, 점점 사람들과 이야기를 안 하고 혼자 일만 한다 싶더니 나중엔 사람들 눈도 피하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힘들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빅> 여러분에게 일하면서 자주 사용한 물건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부탁했었죠. 이곳에 공유한 그 사진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사진에는 제가 먹는 영양제 중 하나만 있는데 책상 위엔 무수히 많거든요.
ki 악! 완전 직장인의 책상이에요. 커피처럼 직장인에게 필수인? 그런 느낌이에요. 고군분투하셨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요.
진짜 나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살고 일하려고 했구나. 내가 나도 모르는 새 보통의 직장인이 된 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도 해야 하고 건강도 챙겨야 하고, 직장인의 삶이 느껴지는 사진입니다. 바쁘면 끼니도 제때 잘 챙겨 먹기 어려우니까 더 영양제 챙겨 먹고 그랬던 것 같아요.
ki 휴 님 사진을 봐도 고생이 참 많으셨다는 게 느껴져요…. 보통 다이어리에 쉬는 날이 있으면 공백이 생기는데 그게 하나도 없는 게.
퇴사한 뒤 자료를 다 버려서 다이어리만 남았어요. 복잡하네요. 정리가 안 되고 그냥 되는 대로 한다, 일단 적는다는 느낌이에요.
ki 전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도피성으로 자꾸 뭔가를 읽는데 퇴사한다면 그렇게 읽던 신문이나 쓰다가 때려치운 업무 다이어리가 종종 떠오를 것 같아요.

<빅> 회사에 ‘나 번아웃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저 말고도 번아웃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누군가 지쳐서 떠나면 새로운 사람 뽑아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좀 쉬면서 일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ki 휴 님과 생각이 비슷한데, 조직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조직을 이루는 개개인이 건강할 수 있게 노력해주면 좋겠어요.
요즘 사람들은 툭하면 회사를 나간다거나 조직에 헌신할 줄 모른다고 말하기 전에 조직이 어떤 모습이기에 젊은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지 돌아보면 좋겠고, 본인들이 만들어온 조직 문화의 고질적인 문제를 성찰했으면 합니다.


황소연
사진제공 휴, 귤, 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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