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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3 에세이

휴대전화 안의 이웃

2021.02.05 | 사물과 사람

성탄절 아침에 집 안 전기가 나갔다. 런던의 시댁에 가려고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보일러, 냉장고, 와이파이가 다 끊겨 있었다. 전기가 끊기면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는 정전이 되어봐야 안다. 기계들이 다 무용했다. 전기 레인지도 전기 주전자도 쓸 수 없으니 따뜻한 물 한 잔 마실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사람을 불렀다. 그런데 성탄절 아침에 누굴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을 깨워 며칠 치 짐을 챙기라고 했다. 여차하면 월요일까지 시댁에 묵어야 할지도 모른다. 냉장고 안 음식 걱정은 일단 잊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우리 동네 채팅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두꺼비집
동네 사람들끼리 묶여 있는 와츠앱(우리로 치면 카톡이다) 단체 채팅방이 있다. 지난해 3월, 코로나19로 1차 록다운(봉쇄)이 시작되었을 때 만들어졌다. 강력한 이동 제한령이 발령하자 독거노인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만들었다. 이 덕분에 거동이 불편한 이웃과 이들을 도와 장을 봐주고 안부를 챙기는 이웃이 짝꿍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관계를 ‘서포트 버블(Support Bubble)’이라고 부른다. 물방울이나 비눗방울 안에 같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한데 묶여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강력한 이동 제한 조치 아래에서는 가구원 이외의 타인을 만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는데 서포트 버블인 경우 만나는 게 허용된다. 지금 영국에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등으로 이루어진 서포트 버블이 어디에나 있다.

잠시 후 새벽잠 없는 이웃이 답신이 했다. “두꺼비집을 열고 퓨즈 스위치를 껐다가 켜보세요. 우리는 그렇게 해요.” “감사합니다. 해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겁이 많은 나나 남편이나 두꺼비집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기계치들은 뭘 만지기 전에 극단적인 상상부터 한다. 잘못 건드려서 배전반이 폭파되거나 온몸이 감전되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상상 말이다.

I가 생각났다. 남편이 전기 기술자다. 우리가 사는 이스트본(Eastbourne)이라는 도시에는 한국 사람이 열 명쯤 산다. I는 그중 한 명이다. 이곳의 한국인 커뮤니티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한국인이니까 마땅히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인간관계의 편한 거리를 안다. 그래서 좋다. 우리는 1년에 한 번쯤 모여 회포를 푼다. 한국말이 고플 때가 있다. 별말 아니어도 위로를 받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맞장구를 치고 웃으려면 한국말이어야 한다. I는 그런 자리에서 서너 번 만난 적이 있다.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사이인데, 성탄절 아침 일찍 카톡을 보내도 될까 3초쯤 망설이다가 두꺼비집 사진과 메시지를 전송했다. 10분도 안 되어 전화가 왔다. “언니, 메시지를 지금 봤어요. 미안해요. 거기 초록색 부분 스위치 보이시죠? 그걸 하나씩 내려보세요. 그리고 가운데 있는 까만 스위치를….” 찬찬히 설명해주는 대로 따라 하니 위잉 하며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기계에 생명에 돌아왔다. 성탄의 기쁨도 돌아왔다.

따뜻한 음식
가벼운 마음으로 시댁을 향했다. 차 안에서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그새 와츠앱 단톡방에 글이 여러 개 올라와 있었다. “정전이라니 안타깝네요. 크리스마스인데 타이밍이 아주 나쁘군요. 우리가 그 댁을 위해서 요크셔푸딩과 따뜻한 채소를 준비했으니 언제 가져다주면 좋을지 알려줘요.”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죠. 우리가 음식을 해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해요.”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안 했더니 이웃 사람들은 성탄절 날 따뜻한 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기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 했다. 고맙다고, 이제 전기 들어왔다고 답신을 보냈다.

괜히 들떠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했다. “사실 전 작가예요. 한국 잡지에 글을 쓰죠. 이번에 우리 골목 공동체에 대해서 썼어요. 링크를 보내줄게요. 여러분이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들이 못 읽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 글에는 성탄절을 맞아 우리 골목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푸드뱅크에 보낸 식료품 무더기와 크리스마스트리 사진이 실려 있으니, 그걸 보고 뿌듯해할 수는 있을 터였다.

10분쯤 지났을까? 내가 보낸 링크를 누군가 다시 보내면서 이런 글을 썼다. “내가 구글로 번역해봤어. 한번 읽어봐. 멋진 글이야, 리키.” 잡지 포맷 등 다른 것은 다 똑같은데 한글이 영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이미지를 보낸 셈인데, 텍스트가 되어 돌아왔다. 인공지능(AI) 번역 실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60% 정도 정확한 것 같은데 그 정도만 해도, 기계 번역임을 감안하고 보면 내용을 파악할 만했다. 사람들이 소감을 댓글로 달았다. “우리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걸.” “우리 골목을 완벽하게 포착했네.” 기타 등등. 구글 번역기로 이런 소통이 가능한 이 시대가 놀랍고 신기하고, 조금 어지러웠다.

최단 거리
사람들이 돌려 보았던 글의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채팅방의 적극적 참여자는 아니다. 참여 관찰 연구자처럼 그저 사람들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무슨 일을 어떤 방식으로 도모하는지, 그 경험을 어떻게 재현하고 회상하면서 공동체가 만들어지는지를 구경한다. 그런 내게도 이 골목 공동체가 주는 직접적인 혜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함’이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닥치거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연락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안다. 채팅방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 누구라도 달려올 것이다. 이웃은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건 안도이고 위안이다. 아마 채팅방에 있는 63명도 다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눈팅’만 할지언정 방에서 나가지 않는다.” (창비주간논평 ‘코로나19와 골목 공동체’ 2020.12.23.)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누군가 달려올 것이라는 짐작을 이렇게 빨리 사실로 확인할 줄은 몰랐다. 크리스마스 날 하루 종일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추운 집에서 찬밥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더운 음식을 가지고 왔음에 틀림없다. 이웃 중 어떤 이가 곤란을 겪으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가까이 산다는 것이 큰 이점이다. 누구보다 쉽게 도와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단지 문 밖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영국은 1월 5일을 기해서 다시 록다운(봉쇄) 되었다. 록다운 첫날도 확진자가 6만 명이 넘게 나왔다. 다들 다시 집에 갇혔고 골목은 텅 비었다. 그래도 닫힌 문 너머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와츠앱을 개설한 그룹장이 소개문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이 불확실한 시기에 서로를 살펴보는 커뮤니티 그룹’. 다른 말로 이웃이다.


글·사진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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