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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57 스페셜

집으로의 휴가, 책장 파먹기(2)

2021.09.07

* 집으로의 휴가, 책장 파먹기(1)에서 이어집니다.

네번째 책, 『기억의 전쟁』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

책 표지를 넘겨, 빨간 면지에 감독이자 작가 이길보라의 사인을 받은 지 5개월이 지났다. 날이 무척이나 더워진 지금에서야 기억의 전쟁을 책장에서 꺼냈다. 집, 그 안에 위치한 책장에까지 도달한 책들은 구매 당시 우리의 소망과 욕망, 기대감을 담고 있다. 내 책장에 꽂혀 있던 기억의 전쟁도 2021년 3월 당시 나의 꿈과 기대를 한껏 담아 샀던 책이다.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전쟁 당시 벌어졌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5년여 동안 제작하며 쌓아온 이야기를 감독 이길보라, 촬영감독 곽소진, 프로듀서 서새롬, 조소나의 시점으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을 구매했을 때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란 꿈에 조금의 기대감과 열정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다큐멘터리가 개봉한다고 하면 이를 보러 극장을 찾아다녔었고 그날도 기억의 전쟁 상영관에 앉아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까지 참석한 후 상영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책 판매 겸 사인회 현장과 마주쳤다. 책을 사고 싶다는 욕망에 기억의 전쟁을 만들며 했던 제작진의 고민과 결정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목적을 덧붙여 곧바로 책을 구매하고 사인을 받았다.

꿈과 책을 향한 감정은 쉽게도 변하고

사인된 책을 건네받으며 “잘 읽겠습니다.”고 말했던 당시로부터 반년도 채 흐르지 않았지만, 이 책을 대하는 마음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1차 변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꿈을 접었다. 지금 나에게 새로운 꿈에 도전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책을 사고 2개월이 지났을 즈음 촬영 중이던 다큐멘터리를 접었다. 막상 제작 현장에 뛰어들려고 보니 나에게 충분한 열정도 지식도 돈도 체력도 없었고 이를 핑계 정도로 여기며 헤쳐나갈 의지도 없다는, 조금은 슬픈 체감을 했다. 웃기지만 한동안은 다큐멘터리와 이별한 듯한 심정이었고 그렇게 책 기억의 전쟁에도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다.

2차 변화, 꿈은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일을 찾아가며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돈되어갔다. 그렇게 이 책을 샀던 목적과 멀어지니 오히려 기억의 전쟁 속 이야기에 좀 더 깨끗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다만 전쟁과 학살, 국가폭력에 대해 말하고 듣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는 용기와 사랑은 또렷이 보였다. 탄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건네고, 시민평화법정에서 용서를 하기 위해 참전 군인들을 향해 “여기로 올라와 내 손을 잡고 사과해주세요.”라고 먼저 말을 건넨다. 럽 아저씨는 동생들의 기일에 한국 아이들과 제작진을 위해 평안을 빈다. 그 모습들과 텍스트로나마 함께하고 싶어 계속해서 읽어내려갔다. ‘여기까지 온 것은 그 제삿밥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길보라의 말에서도 그 사랑과 용기가 기억의 전쟁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 힘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기록될 때 말 그대로 역사가 된다. 나에게는 ‘기억의 전쟁’에 기록된 얼굴, 말과 글이 곧 베트남전쟁에 관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계속되는 기억의 전쟁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는 것,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이자 과정인 다큐멘터리가 의미를 갖는 이유다.

글. 이현주


다섯번째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이고 지며 묻고 싶었던 이야기

54쪽. 책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모두 367쪽이니, 10분의 1도 채 읽지 못한 셈이다. 5년 전 대학교 사회학개론을 들으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수업은 ‘사랑’에 관한 것이었고, 당시 나는 작문으로 치러지는 기말고사의 글감을 미리 준비해보자는 요량으로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은, 가설 2. 대학 시절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았기에 이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을 두고 ‘지독한 혼란’이라니? 이 얼마나 적확하고 알싸한 정의인가? 더욱이 이어지는 부제–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는 당시 어머니의 두 번째 이혼으로 삶의 소용돌이에 함께 휘말리고 있던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책을 쓴 부부에게 대신 묻고 싶었다. 엄마에 관해. 그러고선 버텨내고 싶었나 보다. 그 답을 틀어쥐고서.

하지만 계기가 무색하게, 책은 단 한 번도 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실 해마다 이사를 다녔으므로 조금만 욕심을 버렸어도 곧장 중고서점에 팔려 제값을 치렀을 테지만, 이삿짐을 싸고 푸는 그 운명적 기로에서는 늘 포기할 수 없는 의지가 샘솟고야 만다. 언젠가는 꼭.

그리고 지금, 때가 왔다.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토록 이고 지며 고집했던 이 책 속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단, 여느 때처럼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기로 했다. 재미없으면 바로 덮기다. 하지만 책은 보란 듯이 이렇게 시작하고야 만다.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런 남자와 결혼하신 거죠?”

사랑이라는 종교를 고민하다

책은 사랑과 결혼에 관해 예리하게 정의 내린다. 이를테면, ‘사랑은 종교 이후의 종교이며, 모든 믿음의 종말 이후의 궁극적인 믿음(41쪽)’이라고. 어쩌다 사랑은 종교가 된 것일까? 나는 이 ‘사랑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랑의 뿌리가 ‘불안’이라고 하니, 사실 나는 자신이 없다. 이 각박한 세상에 최소한 ‘너’는 있어야 한단 갈망이 나에게도 예외 없이 간절한 것이다. 고독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결국 안정과 애정보다도 더 결혼의 단단한 토대가 된다는 저자들의 분석은 반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책은 부부 간 갈등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성격’이 아니라 “서로 모순된 두 사회적 역할 간의 충돌”(24쪽)에 있다고 분석한다. 대표적으로 ‘평등’에 대해서 남녀는 다른 조건에 처해 있다. 여성에게 평등은 더 많은 교육과 취업 기회 등을 의미하지만, 남성들에게는 정반대를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봉건적 ‘성별 운명’을 사랑과 결혼으로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불평등은 실재하며, 바로 이것이 사랑을 진부하고 쌀쌀맞아 보이게 만든다.

다만, 저자 부부는 이러한 사랑과 결혼의 본질에 대해서 무조건 좋다, 나쁘다 단정 짓지 않는다. 대신, 결혼을 선택하였다면 ‘당신 자신이 되는 것’, 그리고 똑같이 자신의 자아를 모색하는 그 누군가와 지속해서 ‘함께 사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소 허무하기까지 한데, 그 이유가 ‘우리가 단지 노력해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부는 마지막 장에서 사랑을 지우기에 이른다. 저자들에 따르면 21세기는 사랑이란 감염병이 지나간 뒤로 더는 사랑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혹 22세기에는 사랑을 절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역시나 나는 배신하지 않을 궁극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사랑도, 결혼도 어리석은 혼란을 반복하겠지. 어쩌면 이 책은 끝까지 읽기를 미뤄두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는 게으른 확신이 선다. 종교인에게 신의 부재란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기에. 한편으론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사랑을 포기하기에 우리는 오늘날에 너무나도 조용하게 고통스럽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면 아름다울 테지.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고.”(107쪽)

과연 우리는 이 삶과, 사랑 속에서 제 의미를 찾아갈 수 있을까?

글 | 사진. 김란영
주거 의제 거점 공간 <서울하우징랩>에서 주거 일상을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여섯번째 책, 『돌봄 선언』

우리는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

얼마 전 나는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열흘간 자가격리를 했다. 자가격리 전까지는 내 삶을 돌보는 것은 오롯이 혼자만의 일이라 생각했다. 평소 복용하는 약이 있었던 나는 약 처방을 위해 병원을 가야 했지만, 자가격리 중이었기에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진료 자체는 전화로도 가능했지만, 약을 타는 것은 달랐다. 병원에서도 “약을 탈 수는 있으나, 본인이 아닌 다른 보호자가 직접 타는 것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보호자가 없었다. 결국 약을 타지 못했다. 먹거리는 말해 뭐하겠는가. 배달음식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이런 생활 패턴을 열흘 동안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돌봄이라는 행위가 일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온전히 스스로 살 수 있는 것일까. 할 일 없이 가만히 누워 생각해봤더니, 돌봄은 숨 쉬듯 존재하는 거였다. 친구와 노는 것부터, 애인과 성적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나라는 사람의 에너지를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것이 돌봄이었다. 돌봄과 의존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고자 구입한 이 책은, 결국 팬데믹 상황에서 돌봄을 내 피부로 맞닥뜨리고서야 펼치게 되었다. ‘상호의존’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덕분이었다.

돌봄이 위기가 되지 않도록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만난 책, <돌봄 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은 돌봄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영국의 학술 모임 ‘더 케어 컬렉티브(The Care Collective)’가 썼다. 돌봄을 시장과 가족에게 떠맡겨오며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팬데믹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한 신자유주의의 체제에서는, 스스로를 돌볼 여력조차 나지 않는다. 이에 맞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안은 ‘보편적 돌봄’이다. ‘이는 돌봄을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하며 중심에 놓고 직접적인 ‘대인 돌봄’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종류의 돌봄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지는 사회적 이상을 말한다.’ 보편적 돌봄이 하나의 구호나 호소로만 그치지 않고 인종, 국적, 계급, 젠더, 종차별 등 모든 차별과 착취로부터 자유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책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례를 통해 말하는 것은 바로 ‘돌봄이 중심이 된 정치’다. 가족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현재의 결혼 제도에 속할 수 없어도,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다른 국적을 가졌어도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돌봄 인프라’ 말이다. 책은 친족, 공동체, 국가, 경제, 생태계로 돌봄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넓혀가며 그 로드맵을 보여준다.

팬데믹 이후, 돌봄의 미래

책은 팬데믹 시대에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에 실패했다. 더욱이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와 팬데믹은 그동안 간과되었던 ‘돌봄’이라는 이슈를 비극적인 방식으로 조명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동안 빈곤층 아동들은 결식 상태로 방치되었고, 택배 노동자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해 길에서 쓰러지고,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빈곤 인구가 방치되거나 고독사 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계 종사자들이 코로나19 방역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요양 시설, 장애인 거주 시설, 교정 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팬데믹이 보여주고 있는 건 우리가 돌봄을 시장에 맡겨 ‘외주화’했을 때,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더 취약해진다는 점 아닐까. <돌봄 선언>은 일상 속에서 실현 가능한 돌봄, 또 그것이 차별 없이 실행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통찰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미시적인 생활부터 거시적인 생활 체계까지의 돌봄 단계와 순서를 사유할 수 있다. 책으로 말미암은 생각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서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고민을 던져주는, 활자가 크고 얇은 책이다. 그러니 이 책이 주는 풍성한 사유를 함께해보자!

글 | 사진. 동희
다양성을 향한 지속 가능한 움직임, ‘다움’ 활동 회원. 페미니즘 교육 플랫폼 ‘비두’ 대표.


사진.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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