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남애리
남애리 바다 가는 길금주령이 내려진 구한말, 쌀 부스러기를 모아 술을 빚던 조선 주조사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여행을 떠날 때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젠 조금 다른 의미의 용기가 필요해졌다. 집을 떠나는 아니 집 밖을 나가는 일이 이렇게 찝찝하고 불안한, 심지어 타박받는 일이 되어버리다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개인적인 일상이나 사소한 콘텐츠 하나에서도 ‘여행’을 주제로 삼는 게 조심스럽고 민망한 시국이다. 무엇보다 이 암담한 시국이 끝내 우리가 영영 살아가야 할 시대가 될까 봐, 그게 진정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휴,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언제부턴가 여행 사진 폴더를 열어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마 꼭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만만하고 막강한 변명거리는 없었다. 만사가 꼬이고 또 지긋지긋해지는 무기력한 상태, 나의 무능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것 같은 이 지질한 기분은 모두 전염병 때문이라 믿고 또 우기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아무것도 이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쭈그리고 있는 와중에 남편이 갑자기 강원도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짧으면 두 달, 길면 4년이라나.
남애항“뭐? 어디?”
“속초. 회는 많이 먹겠다. 그치?”
그럼 빨리 ‘속초 맛집’을 찾아… 아니 잠깐만. 이거 참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 채 기꺼이 강원도로 향했다.
이사는 아니고, 여행이라기엔 애매한
남편의 근무지는 속초였지만 부랴부랴 거처를 구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저렴한 월세) 집이 없어서 양양 남애리에 겨우 집을 얻었다. 친구들은 이제 나를 ‘양양댁’이라 불렀고 심지어 몇몇은 ‘될놈될’이라며 부러워했다.
서퍼비치아마 다들 ‘서퍼비치’가 있는 하조대나 ‘서핑의 메카’ 죽도해변 같은 이국적인 풍경을 떠올렸을 테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애리는 읍내에서도 차를 타고 20분이나 더 가야 하는, 그 흔한 빵집 하나 없는 작은 마을이란다, 얘들아.
남애항여행과 유배 사이, 울적한 설렘과 산뜻한 체념으로 양양살이를 시작했다. 어쨌든 오랜만에 사는 곳을 떠나니까, 게다가 집에서 바다가 보이니까, 부정할 수 없는 여행자의 기분으로 사뿐사뿐 집을 채웠다. 그러는 동안 난리 법석이던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남애3리 해수욕장창문을 열면 조율이 잘된 파도 소리와 장난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세 살짜리 아들처럼 수시로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쉴 새 없이 풍겨오는 바다 냄새. 바다가 지척인 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바다 냄새는 어린 시절 티격태격하면서도 어딜 가든 손 붙들고 다녔던 소꿉친구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먹고살기 바빠서 마치 인연을 끊은 것처럼 잊고 살다가 불쑥 마주칠 때면 덤덤하게 속을 내놓고 안부를 전하는.
잘 지내?
응, 나는 불행하게 잘 지내.
꽃잎들이 미리 지어놓은 길을 따라
네 개의 리와 세 개의 해변, 강원도 3대 미항 중 하나인 남애항이 위치한 남애리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명한 마을일지 모르지만, 결코 ‘힙’하거나 ‘핫’한 동네라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어딜 둘러봐도 ‘한국 패치’로 도배된 풍경이 이어지며 세련된 리조트나 펜션 대신 삐뚤빼뚤한 손글씨 간판을 내건 민박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횟집 외에 편의점, 중국집, 치킨집 등 다른 대부분의 영업장이 죄 하나씩밖에 없어서 뭘 고르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게 참 불편하고 또 편했다.
남애리 풍경
“이 정도가 딱 좋아요. 큰 간판을 내 걸면 손님이 잔뜩 올 테니.”
- 영화 <안경> 중에서
남애항매일 아침 눈을 뜨면 배를 채운 뒤 바다로 걸어갔다. 그날그날 어부들이 잡아온 수산물 경매가 열리는 남애항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횟집에서 물고기를 훔쳐 달아나는 고양이의 꽁무니를 쫓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거의 출근하다시피 남애3리 해수욕장을 찾았다. 누가 이유를 물으면 모래가 곱다거나 경치가 좋다거나 하는 싱거운 대답을 하곤 했지만 발길이 자꾸 닿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남애3리 해수욕장남애리의 어원이 ‘꽃잎이 떨어지는 곳’이라는 뜻의 ‘낙매(落梅)’인 것은 매해 꽃이 질 무렵 어딘가 있는 매화나무 군락에서 매화 꽃잎들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라는데, 아마 내 마음이 그 꽃잎들의 길을 따라 걸었던 것 같다.
휴가철이나 주말 외엔 사람보다 갈매기가 더 많은, 우리가 잘 아는 촌스러움과 모른 척하고 싶은 똥고집이 가득한 바다 마을. 어쩌면 ‘완벽’이라는 말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상태보다 애달프게 하던 모든 것이 불필요한 상태에 가깝지 않을까. 이곳 남애리에서 나는 매순간 내 자신을 점검하고 또 비교했던 도시에서 얻어본 적 없는 해방감과 포근함을 느꼈다.
남편의 파견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달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다시 모든 것을 갖춘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강원도로 떠나는 내 마음의 향방을 끝내 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다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별 수 없는 날이면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남애리에서의 시간을 꺼내 먹고 싶어질 것 같다.
글 | 사진. 박코끼리
엉성하고 유연한 여행을 좋아한다. 그리고 여행하는 순간보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 마시는 걸 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