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앞둔 빅이슈 구성원에게 물었다.
휴가를 떠난다면 지금 책장에 ‘콕’ 박혀 있는 책들 중에서
어떤 책을 읽고 싶나요?
지난 여행의 추억을 되감아주는 여행 에세이, 행간의 의미를 살살 굴려 맛볼 수 있는 시집, 일상의 소중함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에세이. 고른 책도, 그 책을 고른 이유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설렘’이었다.
PICK 1.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
사진. 김슬기
나의 포르투갈은
지예은(커뮤니케이션팀)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알딸딸한 와중 친구가 물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 행복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겠냐만은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포르투의 노을 지는 도우로 강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나를 설명하라 요구하는 이 하나 없는 낯설고 자유로운 언덕에 앉아 포르투갈 맥주 수퍼복을 마셨고, 뜨거운 태양은 강물에 식어갔다. 잔디밭에 반쯤 누운 사람들은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는 사실마저 잊은 듯 술기운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평소 같았으면 소음으로 들렸을 노래마저 영화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20대 초반, 맞지 않는 전공에 수강 신청까지 망친 나는 ‘자아를 찾겠다’며 휴학을 했다. 무언가 해보겠다는 초심과는 달리, 하루의 반을 아르바이트에 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동료가 유럽으로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줍게 꺼냈다. 반짝이던 눈빛에 매료된 건지 일주일 뒤 혼자 파리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만난 포르투갈이었다. 혼자가 두려웠고, 망설이며 살아온 내게 포르투갈의 따뜻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혼자서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몇 년 후,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져갈 때쯤 이 책을 만났다. 책 곳곳에는 작가가 수집한 포르투갈의 사탕 봉지, 나뭇잎, 버스 티켓 같은 것들이 콜라주 되어 있다. 작지만 생생한 도시의 조각들. 작은 것들을 소중히 모아온 작가의 감성이 참 좋았다. 행복했던 포르투갈의 기억과 작가의 감성이 어우러져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는 내 책장의 일부가 되었다.
꼭 다시 가야지 주문을 외우며 살지만, 여전히 포르투갈은 멀다. 또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망설이고 때때로 무너진다. 그럴 때면 책을 펴고 그 시절의 조금은 단단했던 나를 마주하며 위로를 얻는다. 나에게 포르투갈은 위로다. 이번 휴가에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소파에 앉아 포르투갈 여행을 떠나려 한다. 공항의 탑승 게이트 앞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떨림이 다시 현실이 되길 기다리며.
PICK 2.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사진. 김슬기
여름
김예나라(판매팀)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다. 지중해와 대서양 경계 그 어드메쯤, 조금 이른 여름 휴가지에서였다. 가방 속엔 탈수를 방지할 사과와 물, 햇빛을 막을 선글라스와 선블록, 그리고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이 유용하게 쓰였으나 책만은 예외였다. 바다 건너 낯선 나라에까지 들고 올 만큼 흥미로운 책이었을 텐데 지금은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턱 끝까지 넘실대던 파도와 바다 동굴, 백사장에 닿은 등과 얼굴에 느껴지던 햇볕. 지금도 그런 것들만 선명한 걸 보면 그 책은 기억 저 한구석으로 밀려난 게 분명하다.
휴가지에서는 그곳의 서정을 방해해선 안 된다. 오롯이 지금 여기의 바람과 온도, 습도가 내 것일 수 있도록 책은 잠깐씩만 집어 든다. 휴가용 책은 그래서, 시집이어야 한다. 읽는 시간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하니까. 시 한 편을 읽고 책장을 덮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이 시를 오래도록 입안에서 굴려보는 거다. 읽는 데 걸렸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
사실 평소 시집은 즐겨 읽지 않는다. 그래도 휴가지에서라면 역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좋겠다. 스무 살 전공 수업에서 랭보를 처음 만났다. 아르튀르 랭보, 이름마저 문학스러운 구석이 있는 데다 흑백사진 속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은 얼마나 신비롭던지. 무엇보다 랭보가 이 시를 열아홉에 썼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글자들을 훑어내리며 원어로 온전히 시를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여름 다시 이 책을 읽으려 한다. 여전히 번역의 필터를 거치는 것에 아쉬움이 든다면 불어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PICK 3.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사진. 김슬기
일상과 여행 사이
최정인(커뮤니케이션팀)
보통 이맘때면 여름휴가를 위한 짐을 쌌다. 계획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짐 가방 속에 넣는 편인데, 막바지에 이르면 꼭 책 한두 권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사실 알고 있다. 가져간 책을 다 읽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어떤 책을 고르는가.’는 여행의 무드를 처음 결정하는 나름의 신중한 루틴이다.
읽는 속도보다는 사는 양이 많아 늘 ‘언젠가는 꼭 한 번 읽을 책’으로 채워져 있는 책장의 책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에 구매한 직무와 관련된 책이거나, 혹은 오롯한 의미에서의 에세이나 소설이다. 휴가를 앞두고는 ‘언젠가 읽어야 할’ 일과 관련된 책과 ‘꼭 한 번쯤 읽고 싶었던’ 소설 사이에서 늘 고민한다.
이 책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는 후자에 가깝다. ‘가만히’, ‘혼자’, ‘웃고’, ‘오후’… 좋아하는 단어들로 채워진 제목만큼이나 글도 따뜻하다. 짧은 산문들이 여러 편 실려 있는데,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온통 ‘일상의 조촐한 일들, 작은 보람과 기쁨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상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글들을 마주하고 있자면 어쩐지 힘주고 있던 어깨가 가벼워지고,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매일이 휴가 같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하루는 특별할 일 없이 흘러간다. 일과 사람은 매번 내 맘 같지 않아 익숙해질 때면 뒤통수를 친다. 자주 지루해지는 매일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쉼을 챙겨야 한다. 작년에 이어 이번 휴가 역시 공항도, 붐비는 바다도, 이국적인 풍경도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 책이 필요한 때다. 읽기로 마음먹은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좋다. 여행지의 호텔 대신 방에서 읽는 누군가의 조촐한 순간들에 대한 단상은 그 자체로도 여행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특별할 게 없는 8월의 휴가가 어렴풋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