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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3 에세이

타인의 방 :: 이 한 몸 뉠 곳은 어디에

2021.11.25 |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싶다.

누군가에게 집은 따뜻하고 포근한 곳일 거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의 내게 있어 집은 소름 끼치는 공간으로 기억된다. 당시 다 큰 성인이었지만 가끔 가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지친 하루를 끝내면 제 갈 길 바삐 가는 사람들 속에서 언제나 나만 집으로 향하는 길이 느릿느릿했다.

그 무렵의 나는 서울에서 집값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동네의 매물을 여럿 구경하기 바빴다. 막상 둘러보니 가성비 좋은 동네는 다 옛말이었다. 예산이 넉넉하면 어디든 좋으련만, 정해진 예산 안에서 번듯한 집을 찾기란 어려웠다. 대궐 같은 집을 바란 건 아닌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주거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곳도 많았다. 결국 떠밀려나듯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집을 구해야만 했다. 불편한 교통 조건을 감수하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서울에서는 단칸방 하나 가격이 그곳에서는 투룸이 되는 ‘매직’을 경험했다.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심정으로 매일 매물을 샅샅이 훑었다. 그 결과 운 좋게도 단독주택 매물도 발견했다. 다만 다세대주택이라, 1층에는 외국인 부부가 살고 있어서 2층만 임대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각자 입구가 달라서 접촉할 일이 아예 없어 보였고, 오밀조밀 모여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땐 뭐 그리 급했는지. 어릴 때부터 가슴속에 품었던 단독주택 로망 때문에 뭐가 씌인 듯 계약을 단숨에 체결했다.

집은 연식이 있어서 현대식으로 세련되지는 않아도 투박한 멋이 있었다. 낡은 보랏빛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면 식물을 키울 만한 공간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또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옷을 수납할 만한 방도 널찍해서 만족스러웠다. 월세가 저렴하니 체리 몰딩과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조차 사랑스러워 보였다. 특히, 집주인이 비구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불교의 계율을 깨친 사람이니 선할 것 같다는 출처 모를 확신이 들었다.

비구니와 노인, 이 두 단어를 토대로 연상한 집주인은 어딘지 쇠잔하고 오랜 채식으로 체형이 호리호리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집을 계약할 때 만난 집주인은 의외로 풍채가 좋았다. 축 처진 눈에 입꼬리는 올라가서 푸근하고 인심이 후덕해 보였다. 집주인은 선뜻 “옆 건물 불당에 차 마시러 들러요.”라며 내게 호의적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집주인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나쁘지 않았다.

'낯선 타인과의 불편한 동거'

첫인상을 믿으면 안 되는 사건이 연거푸 일어났다. 언젠가부터 집주인이 우리 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한번은 밖이 소란스러워서 작은 문구멍을 통해 밖을 확인했는데, 집을 염탐하려는 집주인의 눈과 마주친 적이 있다. 제아무리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나여도 그땐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이후에도 집주인은 방을 확인하러 틈틈이 2층에 들렀다.

계약 땐 몰랐던 사실인데, 거주하는 단독주택이 실은 3층이라고 한다. 외관으로 볼 땐 2층처럼 보이지만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의 비밀의 방처럼 숨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집주인이 서재로 사용하는 3층을 가기 위해선 2층을 거쳐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집주인은 불리한 이야기는 쏙 뺀 채로 계약한 셈이었다.

이사 오고 나선 황당함의 연속이었다. 집주인은 늘 “(자신을) 친할머니처럼 생각해.”라는 말로 나를 강압했다. ‘집을 찾아오면 얼마나 찾아오겠어.’ 그렇게 짐작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나중에 집주인은 도어 록 비밀번호까지 공유하기를 원했다. 도어 록 비밀번호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방문 전에 미리 귀띔만 해주시면 집 문을 열어드릴게요.”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집주인의 무례함으로 인류애가 바닥 쳤던 사건이었다.

‘을’인 임차인 입장에서는 ‘갑’인 집주인을 제재하기도 멋쩍었다. 따졌다가 재계약 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갑의 위치를 이용해 선을 한 번 넘으니 두 번, 세 번도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샤워를 하고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집을 방문했다. 같은 여자여도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이 들었다. 참다 참다가 하루는 도어 록 비밀번호를 바꿨더니 집주인이 비밀번호를 마음대로 바꿨다며 문을 거칠게 주먹으로 두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유령처럼 숨죽여 있는 것뿐이었다.

갈등의 클라이맥스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그날 잊을 수 없는 최악의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은 아침 8시부터 초대하지 않은 낯선 손님까지 데려왔다. 제자라던 젊은 남자 스님 여러 명을 대동해 집을 찾아왔다. “문을 열지 않으면 칼로 죽여버리겠다.”라는 둥, 폭언을 일삼았다. 동시에 “자신은 금수저 건물주고, 유명 대학의 교수다.”라는 말까지 쏟아냈다. 무소유를 설파할 사람이 풀소유를 운운하니 아이러니했다.

나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곧장 경찰서에도 갔다. ‘살해 위협을 당한다.’고 하니 처음엔 경찰관도 관심을 보였지만, 집주인이 노인이며 비구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걸 느꼈다. “죽여버린다”라는 말에 살해 의도가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며 심드렁하게 응수했다. 증거가 많거나, 신체적으로 폭력이 행사되어야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답변이 전부였다. ‘내가 정말 칼에 찔려야 처벌이 가능한 걸까?’ 비참한 기분이었다. 법률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았지만, 주머니 사정이 퍽퍽한 취준생이어서 많은 시간과 돈을 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난생처음으로 법은 약자를 보호하고 구제하고자 존재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주변 사람들은 왜 참고 사냐며 나를 답답하게 생각했다. 원래 타인에게 건네는 조언은 쉽고, 정작 내 문제가 되면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어렵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감하게 항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 조치를 마땅히 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다. 참거나 떠나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계약 기간이 꽤 남았음에도 쫓기듯 이사를 나가야 했다.

'이 한 몸 뉠 곳은 어디에'

내 돈으로 월세를 내고 살았지만 내 집이 아니었다. 1년 동안 남의 집에 얹혀산 것처럼 불편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 내 한 몸 뉘일 집 하나 없는 게 야속했다. 쉬지 않고 일했지만 가진 게 없다는 건 죄였다. 그 벌로 몇 해가 흐른 지금도 비밀번호 도어 록 누르는 소리만 들어도 PTSD가 오고, 집주인과 비슷한 실루엣을 만나면 가던 길도 돌아갈 정도다.

당시엔 이미 어른이었음에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차가웠다. 겪지 않아도 될 경험을 겪으면서 세상엔 나쁜 어른도 많다는 걸 배웠다. 놀랍게도 과장 하나 없는 이 경험을 언젠가 꼭 세상에 얘기하겠다 다짐했는데 이번 기회를 빌려 오래 묵혔던 글을 쓰게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는 교훈은커녕 희망도 없다. 훈훈한 결말을 기대했다면 정말 미안하게 됐다. 독자에게 단지 건네줄 수 있는 말은 “정신 차려요. 우리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밖에 없다.

나는 가끔 그 집의 다음 임차인의 얼굴을 상상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아마도 그는 지금 그 집에서 갑질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고 있지 않을까.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까 집을 포기할 수 없던 그 옛날의 나처럼. 그 집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의 몸과 마음이 상하지 않고 건강하기를 빌어본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63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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