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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70 에세이

안녕, 언어의 정원

2022.03.16

여름 수풀에 핀 하늘나리처럼 남모르는 사랑은 고통이어라.(<만요슈> 8권 1500)
-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중에서

[영화<언어의 정원> ㈜팝엔터테인먼트]


얼마 전, <언어의 정원> 소설판을 낭독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작품은 2013년에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 내가 주인공 ‘아키즈키 타카오’의 목소리를 더빙했었다. 감독은 영화의 내용을 줄기로 해서 소설도 썼다. 낭독하기로 결정하고 나는 먼저 소설의 가장 뒷부분으로 가서 작가 후기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학생 시절 영화의 원작 소설을 찾아 읽는 취미를 즐기던 나인데, 무슨 까닭인지 정작 더빙 작업에까지 참여한 이 작품은 낭독 의뢰를 받기 전까지 소설을 읽지 않았다. 언젠가 읽으려고 사놓긴 했다. 작품을 본 팬들에게 선물 받은 책도 몇 권 있다. 그런데 어쩐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어 들었다가도 그냥 내려놓곤 했다. 내용을 이미 다 알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을 모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뒷이야기를, 여러 등장인물의 상세한 사정이라든가 속마음을, 구태여 들여다보기 싫어서 작가 후기를 먼저 읽으며 끝까지 미룬 거다. 이제 ‘일’이 되어버렸으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17년 <너의 이름은.>이 크게 흥행하기 전에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유명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대단한 유명인이었다. 성우가 되기 한참 전, TV에서 우연히 이 감독의 초기 작품인 <별의 목소리>를 보았다. 작품 속 두 남녀 주인공이 우주를 사이에 두고 점점 멀어지는 내용이었다. 러닝타임 25분 동안 둘은 몇 광년 멀어져 메시지 하나를 주고받는 데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상영 시간은 짧았지만 여운은 결코 짧지 않아서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기에 충분했다. 후속작 몇 편을 더 본 후에는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나중에 성우가 되어 이 감독의 작품에 두 번이나 주인공을 맡게 될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흔히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우는 작품 없이 살 수 없다. 작품에 참여하는 성우는 처음에 그 작품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작품 속에 녹아들어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그 작품들은 그 성우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 마법 같은 이 과정은 삶이나 사랑과 비슷한 면을 맞대고 있다. 성우와 작품, 그 사이에 오디션이 있다. 오디션을 통해 성우는 작품과 만나고 맺어질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볼 때 오디션은 일종의 고백이다.

꽤 여러 번 사랑 고백을 해봤다. 그리고 많이 거절당했다. 나는 이 경험이 오디션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고 믿는다. 미신에 가까운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논리는 있다. 고백은 오디션과 닮았지만, 면밀히 따지자면 고백은 오디션의 상급자 코스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오는 오디션 제안 전화처럼 사랑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오디션은 할 말이 주어진다. 대사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말을 언제, 어디서 해야 할지도 다 정해준다. 그냥 그 말을 어떻게 할지만 고민하면 된다. 고백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로맨틱한 장소를 알아보고, 적당한 타이밍을 살피고, 마음을 조심스레 말로 옮겨보고,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곱씹어봐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은 로맨틱한 곳도 아니고 적당하지도 않은 타이밍에 제멋대로 언어가 되어 뛰쳐나간다. <언어의 정원> 속 타카오가 그랬던 것처럼, 어릴 때의 나처럼. 어설픈 짝사랑 고백은 대개 이런 모습이다.

처음에는 누가 나한테 저주라도 건 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고백했다가 거절당할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저주다. 여러 번 슬픔과 창피의 터널을 지나면서 조금씩 깨달았다. 좋아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그 사람 앞에 선 내 모습이 평소의 나와 달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뻣뻣한 막대 인형처럼 움직이고 하지 않으면 좋을 농담을 하고, 상대가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들을 확대해석 한다. 혼자 설레고 혼자 들뜬다.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오디션 연습이었다고 생각해보니 내가 조금 덜 바보 같기도 했고 덜 불쌍하기도 했다.

천천히 오랫동안 헤어지는 일에 대하여
정확한 행방은 잘 모르지만, 부모님 집 어느 구석에 아직도 내가 사춘기 내내 짝사랑하던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상자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상자를 열어본 건 <언어의 정원> 녹음을 앞둔 2013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 상자를 잘 열어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비를 몰고 오는 상자 같았다. 거기 쓰인 글자 하나하나마다 마음속에 빗방울이 되어 하나씩 떨어지고, 금세 우레가 몰려온다. 편지에 쓰인 말들은 모두 상냥하다. 그 상냥한 말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햇빛에 비추어 보면서 혼자 설레고 혼자 들떴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간이 만든 먼지가 그 위에 쌓인 뒤에야 그 글자들의 뒷면이 보인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고맙다. 그러나 너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달뜬 열기에 눈이 가려 읽지 못했다. 이제는 선명히 보인다. 낯이 뜨겁다. 그래서 나는 그 상자를 잘 열어보지 못했었다. 마음에 비를 뿌리는 편지 속 언어들을, 나는 수장시켰다. 편지 상자는 그렇게 수장된 언어들이 가라앉은 연못이었다. 2013년, 타카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연못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디션을 거쳐 성우가 되었다. 오디션을 통해 여러 작품을 만났고, 지금도 오디션을 본다. 그 자리에 설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짝사랑하는 소년이다. 집에서 주어진 대사들을 곱씹고 연습하지만, 오디션의 자리에서는 마치 연정을 품고 있다가 엉뚱한 타이밍에 고백이 튀어나온 듯이 뱉어야 한다. 현실에서는 이런 고백이 오히려 상대를 밀어내기도 하지만, 오디션장에서는 마음 놓고 바보가 되는 편이 좋다. <언어의 정원> 오디션을 볼 때, 편지를 다시 보며 내가 바보였던 시절을 불러냈고, 녹음하는 내내 바보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언제나 소설을 외사랑해왔다.’ 소설 <언어의 정원> 작가 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낭독하는 동안 이런 걱정을 했다. 이제 내 안에 들어 있는 바보가 아주 영악해진 것은 아닐까. 많은 거절 속에 기적처럼 고개를 끄덕여준 이들이 있었고, 그 덕에 나는 결혼을 하고 직업을 얻고 여러 작품을 만났다. 그러는 사이 내 안의 바보가 떠나버리지 않았을까.

아내에게도 고백한 날이 있었다. 내가 많이 컸고, 꽤 많은 아픔을 이겨냈고,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여기던 때였다. 아내는 내가 말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어떤 때는 앉은자리에서 수다를 떨다 고개를 들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 있기도 했다. 내가 맛있는 걸 사준다고 하면 늦은 시간에도 쪼르르 달려 나왔다. 난 확신했다. 나한테 단단히 빠져들었군. 그것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나는 원래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오래 들어주는 편이야. 그래서 상담심리를 전공했나 봐. 그리고 맛있는 걸 알아서 사주겠다는 데 얻어먹어서 나쁠 게 없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야심한 시각에 불러내는 데도 흔쾌히 나왔단 말야?
“우리 동네 가로등이 밝잖아. 그리고 오빠는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거든.” 위험하지 못한 나는, 단단한 착각에 용기를 얻어 고백을 한 것이다. 바보가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신인 때 애니메이션 더빙을 한 작품의 소설판을 낭독하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오랜 옛날 연못에 가라앉은 편지 상자를 건져 열어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타카오 역으로 오디션을 보고 연기를 하면서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에 내 이름을 올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나의 어린 시절 모습과 겹쳐지는 그의 목소리가 되어보면 내게 있었던 일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것 같다. 소설에는 주인공뿐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의 속마음과 입장이 쓰여 있었다. 타카오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타카오가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 시점의 모든 뒷이야기가 소설에 드러나 있었다. 그 시점에 타카오가 그 모든 사정을 알았다면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까? 아니다. 각자 가진 사정의 무게에 짓눌려 고백조차 꺼내지 못했을 것 같다. 밝은 햇살에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비구름에 가려진 부분이 발을 내딛고 말을 건네게도 하는가 보다.
긴 시간이 걸려 맺어지는 사랑이 있듯이, 긴 이별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랑은 만나는 시간보다 헤어지는 시간이 더 길기도 하다. 애니메이션도 더빙하고 같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도 낭독하고 나면 뭘 많이 알게 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정말 헤어진 느낌이다. 잊은 줄 알았는데 천천히 오랫동안 헤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서서 손을 흔들고, 이제 돌아선다.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70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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