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새해를 힘차게 시작했지만, 연휴가 지나고 돌아온 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도시의 노동자로 산다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다. 업무의 강도만 다를 뿐 누구나 삭막한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노동자의 태생적인 외로움이 임계점이 다다랐을 때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서울 근교의 펜션에서 쉬고 오는 일정을 잡았다.
양평을 거쳐 청평으로 가는 여정에서 나는 국밥 생각이 간절해졌다. 국밥에 타고 흐르는 온기는 도시의 외로움을 위로한다. 경기도 양평은 국밥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형태의 국밥이 있다. 이제는 해장국의 대명사가 된 양평해장국(양평군 신내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이 있고, 독보적인 진득함을 자랑하는 순댓국도 있다. 나는 순댓국을 편애한다. 언제 먹어도 든든하고 숙취에 허덕이는 날에는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가격도 저렴하고 어디에나 있어서 편의성과 기능성을 겸한다. 이보다 좋을 순 없다.
감히 말하건대, 국밥은 혁명이다
내게 양평은 각별한 지역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살았던 곳이라 양평 시내를 지나치는 날에는 삼대가 함께 따뜻한 국물 요리로 푸짐하게 식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본적으로 국밥을 좋아하는 내 편협한 먹성은 어찌 보면 외할머니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는 주말이면 할머니의 집에 가 식사 대접을 하며 일주일을 마무리했다. 할머니는 외식을 좋아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북에서 넘어오셔서 일찍이 부산에서 냉면 장사를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 순화동으로 이사를 와서 할아버지의 건강한 식단을 챙기면서 동시에 돌아서면 배고픈 네 남매를 부지런히 먹여 키우셨다. 할머니는 50년이 넘는 주방 경력에 신물이 났는지 함께 사는 삼촌의 끼니를 챙기는 것 외에 요리에는 큰 관심이 없으셨다.
어린 나의 눈에 할머니는 젊은 사람처럼 짜장면과 탕수육을 즐겨 드시고, 보신탕 같은 전골 요리도 힘이 난다며 잘 드셨다. 함께 한 중국 여행에서 베이징덕도 잘 드셨던 모습을 보면 어느 국적의 음식에도 거부감이 없고 언제나 탁월한 먹성을 자랑하는 현재의 나 자신이 결코 우연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 양평을 갈 일이 없었다. 그러다 이번 여정에 같이 차를 타고 가는 일행들이 순댓국으로 의기투합을 하면서 경유지가 됐다. 배는 이미 고픈 상황이었고 먹성들이 좋아서 ‘점저’로 먹는 순댓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들끼리 가는 여정은 단순하면서 투박하다. 별일 아닌 것에 집착하고 복잡한 결정은 단순화된다. 20~30대 남성이 함께 먹는 음식은 돈가스나 국밥일 확률이 높다. 기본적으로 양이 든든하고 맛이 보장되는 선택이다.
양평군 개군면에 있는 개군할머니토종순대국은 전국의 순댓국 맛집 중에 손에 꼽히는 상업성과 진정성을 자랑하는 곳이다. 어느 블로그는 이곳을 ‘올곧은 노동이 내는 순수한 맛’이라고 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작은 건물에 가정집을 개조한 형태의 업장이다. 유명세에 비하면 소박하다. 문을 열면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길게 붙어 있다. 프랜차이즈 국밥집의 큰 홀의 형태가 익숙하다면 생소한 풍경이다.
자리에 앉으니 가장 먼저 삶은 간을 준다. 갓 삶은 간은 부드러우면서 녹진한 내장의 맛을 선사한다. 뒷맛은 달다. 새우젓이 없어도 심심하지 않다. 매콤한 겉절이김치를 곁들이면 국물이 없어도 침이 흥건히 고인다. 모둠순대는 여럿이 왔을 때 시킬 수 있는 특권이다. 삼색의 피순대와 머릿고기가 함께 나온다. 겨자, 간장, 다대기 삼원색의 장을 섞으면 마법의 소스다. 순대는 작은 젓가락질에도 저항감이 없이 부드럽고 머릿고기는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순댓국의 등장은 스펙터클하다. 무쇠처럼 단단한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손님상에 나온다. 이 순댓국은 서울의 그것보다 더 깊고 진하다. 시래기가 들어 속까지 구수하다. 곱창은 길쭉하게 들어가 있다. 깔끔하게 손질이 잘 되어 식감을 생생하게 전하고 깊은 국물에 자취를 감춘다. 순대는 쫄깃하면서 분명한 질적 팽창을 한다. 이런 요소들은 작은 끼니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동행한 일행에게 내 국밥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맛의 레이어를 위해서는 밥을 말아야 한다며 강권하고 ‘프로 국밥러’의 자질을 논했다. 뚝배기를 기울여 남은 국물까지 먹고 식사는 마무리됐다.
우리는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왔다. 색이 바랜 간판을 뒤로 해는 저물고 있었고, 든든한 배와 듬직한 친구들이 있으니 근대의 혁명가처럼 자신감이 차올랐다. 국밥은 혁명이다.
개군할머니토종순대국
경기 양평군 개군면 하자포길 29
매일 06:00~22:00
※ 더 많은 사진과 기사 전문은 매거진 '빅이슈'270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 사진. 미식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