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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2 에세이

내 일이 아니라서

2022.09.12

ⓒ 고스트스테이션 포스터

밤 11시 10분 무렵, 야간자율학습 마지막 시간, 50분 뒤면 집에 잠깐 다녀올 수 있는 그때에 정적을 깨고 누가 말했습니다. “아, 진짜 고려대만 갈 수 있으면 목숨이 10년 깎여도 괜찮은데!” 누군가의 잠투정일 수도 있고 어떤 폭발일 수도 있는 그 소리에 교실이 술렁였습니다. 서강대에 10년, 중앙대에 10년, 서울대에 20년… 난데없이 시작된 목숨 배틀은 웃음과 한숨 속에서 꽤 긴 시간 이어졌습니다. 그 터무니없는 한풀이를 끝낸 건 “조용하고 공부하자.”는 반장의 일갈도, 교탁을 두드리는 감독 선생님의 난입도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가 나직하게 이렇게 말해서였습니다. “우리 목숨이 뭐라고…”

목숨이 뭐라고 집에 가서 홍삼을 마시고 비타민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2시가 되어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신해철이 진행하는 <고스트스테이션>이 SBS에서 MBC로 넘어와 <고스트네이션>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죠. 그 방송은 경고 문구로 시작했는데, “청취함으로써 생기는 물질적·정신적·육체적 피해, 성적 하락, 인생 변화, 불면증, 가정불화, 왕따, 귀차니즘 등에 대해 제작진 일동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제 성적 같은 건 책임지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그 방송이 참 좋았는데, 어쩌면 그때 주변에 저를 책임지려는 어른이 너무 많아서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날 인생 처음으로 ‘방게’라 불리던 사연 게시판에 글을 썼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저는 모범생과였는데, 껄렁껄렁한 반말을 억지로 쥐어짜내가며 자습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적은 기억이 납니다. 뭔가를 적고 나니 자꾸 가슴이 뛰었는데 내 사연이 방송에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마왕’이 읽는다면 뭐라고 할까. 지금은 신해철이 따뜻한 인생 멘토로 기억되지만, 그 방송은 꼭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진지한 고민은 평가절하당하기도 하고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죠. 웃음거리라도 되고 싶었습니다. 좀처럼 누구를 웃길 기회가 없던 때였거든요. 한 시간의 방송은 유난히 짧게 지나갔고 제 사연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게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저 같은 애가 한둘이었을까요.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나라에서 그런 말장난이 방송감이 될 리가 없죠.

ⓒ <Ghost Touch> 앨범커버

며칠 전에는 낮 2시에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이른바 입시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 ‘학생부종합전형(학종) 폐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양측의 이야기가 다 일리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학종은 평가 기준을 잘 모르겠으니 문제가 많지(끄덕끄덕), 다시 줄 세우기로 돌아가면 부작용이 크지(끄덕끄덕), 이 문제는 정말 조금도 나아지는 게 없군(끄덕끄덕). 입시 문제는 여전하고도 새롭게 난리입니다.

대입에 관한 최초의 공포를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습니다. 어릴 때 몸집도 작고 운동에도 소질이 없었는데, 첫 운동회에서 달리기 꼴찌를 하자 부모님이 대학은 가겠냐며 걱정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때는 체력장이라는 평가가 있어서 1킬로미터를 3분 53초 안에 뛰어야 대학 가는 데 유리했거든요. 해마다 그 시험을 치르다 고등학생 형 누나들이 죽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체력을 단련할 시간은 그때도 학교에서 따로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죽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 많지 않겠죠. 다행히 체력장은 1997년에 폐지되었고 저는 여전히 달리기를 못했지만 살아서 대학에 갔습니다. 이 기억 때문인지, 정시로 돌아가자는 말은 꼭 그 체력장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지역균형’ ‘기회균형’ 그 좋은 말들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끄덕끄덕 알겠지만요.

신해철 5주기가 지나며 그를 조명하는 기획이 많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의 라디오방송을 팟캐스트로 듣는데 그때마다 ‘신해철이 살아 있다면…’ 하고 되뇌게 됩니다. 그가 있었다면 지금 벌어지는 촌극을 분명 솜씨 좋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테니까요. 대입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건, 그게 너무 빨리 ‘남의 일’이 되고 너무 빨리 ‘내 자식의 일’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어도 성심성의껏 웃겨주던 그 목소리가, 수능날이 되니 더 생각납니다. 신해철이 살아 있다면 또 그에게 사연을 보낼 텐데요. 이번에는 정말 더 껄렁껄렁하게 잘 쓸 수 있는데 말이죠.


글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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