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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3 스페셜

음악의 촉감 ― 카세트 테이프

2022.09.19


자주 가던 음반 매장의 카세트테이프 코너가 한 폭 남짓으로 줄어들고, 친구들이 CD를 수십 장씩 모을 때에도 나는 계속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다녔다. 특별한 고집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카세트테이프는 CD의 반값이었고, 작은 서랍 안에 모아도 될 만큼 수납이 쉬웠다. 책상 위의 카세트오디오와 가방 속의 ‘워크맨’은 10년을 쓰는 동안 고장 한 번 난 적이 없었고, 행여 흠집이 날까 손 끝으로 CD를 조심조심 집는 친구들의 모습은 음악을 듣는 기존의 내 방식을 바꿀 만큼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진정한 팬이라면 테이프가 아니라 CD를 사야 한다. 오직 CD만이 매출로 집계되기 때문’이란 주장을 펼칠 무렵 음반 매장의 카세트테이프 코너는 완전히 사라졌고, 시대를 원망하기도 전에 기술의 조류는 더욱 야속하게 흘러 mp3라는 소리의 바다가 되었다. mp3는 레코드, 카세트테이프, CD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분야로 구현되는 것이었기에, 그 혁신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운로드를 통해 내가 원하는 세상의 모든 노래를 모아 듣는 것은, 가게에서 직접 구입한 한 가수의 앨범을 통째 훑어 듣는 것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행위였고 그래서 이전 매체가 소멸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인식적인 구분이 무색하게 mp3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 뒤, 삼각기둥 모양의 아이리버가 컬러 디스플레이가 있는 아이팟으로 바뀌고, 더는 재생 기기를 따로 둘 필요 없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는 지금에 이르는 동안 내가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다시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퇴행적 즐거움’

경리단길과 연희동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세게 겪은 동네를 다룬 다큐멘터리엔 그곳에서 몇 십 년간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등장한다. 집 앞 담벼락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일행을 보며 ‘좋은 곳 많은데 굳이 이 허름한 골목에서 사진을 찍냐.’라고 말하는 다큐 속 할머니의 목소리는 과거를 소환해 ‘힙한 변화’를 입히는 ‘뉴트로’ 열풍에 대한 나의 거부감과 닮았다. 2016년 샤이니가 정규 5집 <1 of 1>을 통해 카세트테이프를 한정판으로 발매했을 때, 나는 연희동 할머니처럼 그것으로 향한 사람들의 관심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난데없이 LP판을 모을 때 엄마의 속내가 이랬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섭섭한 마음은 과거를 반추할 수 있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나는 어렵게 구입한 <1 of 1> 카세트테이프를 듣기 위해 창고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오디오를 꺼냈다. 익숙하게 열림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재생하는 순간,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배운 음악의 촉감이 단번에 되살아났다. 휴대용 카세트의 건전지를 갈아 끼우고, 좋아하는 트랙을 듣기 위해 앨범 속 트랙의 목차를 살피고, 버튼을 눌러 음악의 순서를 감아내던 이 퇴행적 즐거움을 내가 몹시 그리워했다는 사실도.

카세트테이프에만 있는 것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와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을 품고 다룬다. 내가 태어나 가장 많이 들었던 카세트테이프인 보아 정규 2집 <No.1>은 A면에서 보아를 아시아의 별로 만든 타이틀 ‘No.1’으로 시작해 색소폰 베이스의 느린 발라드 ‘Dear My Love…’로 끝난다. 그렇게 여운을 가득 품고 B면으로 테이프를 뒤집어 꽂으면 웅장한 비트의 첫번째 트랙 ‘난(Beat it!)’이 분위기를 전환하듯이 우렁차게 흘러나온다. 마치 연극의 인터미션 전후를 즐기는 것 같은 극적인 구성은 CD나 스트리밍을 통한 감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음악을 듣는 이들 사이에 부는 ‘뉴트로’ 열풍을 그저 인위적인 낭만으로 치부하기엔 테이프를 뒤집어 끼우고, 턴테이블의 바늘을 옮기고, 아끼는 CD의 얼룩을 닦는 경험은 너무나 짜릿해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그 감각을 나누고 싶어진다. 물성 자체가 미래를 위협하는 오염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다시 돌아온 아날로그 유행들은 가끔 복잡한 마음을 들게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를 매료시켰던 멜로디의 촉감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원하고, 원할 것이라는 점이다.


글. 복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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