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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85

90310을 기억하며

2022.10.24

ⓒ pixabay

올여름, 폭염과 폭우 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숨을 거둔 존재들이 있다. 기후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알리는 뉴스에서 이들은 축사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돼지와 닭은 땀샘이 없어 사람보다 더위에 취약하지만, 보통의 실내 공간보다 2도 정도 온도가 더 높은 축사 안에 산다. 올 7월엔 제주의 한 축사에서 온도를 낮추는 장비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 발생한 정전으로 닭 1천여 마리가 죽었고, 8월 제주에선 폭염으로 돼지 1천 102마리가, 양식장의 넙치 4만 8천 마리가 죽었다.(8월 10일 기준) 8월 폭우가 내렸던 2~3일의 기간 동안 전국에서 ‘가축’ 2만 533마리가 죽었다. 재난 상황에서도 이동할 권리가 없는,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는 비인간 동물의 현실이다.

구조됐으나 살아남지 못한 존재

ⓒ unsplash

축사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텐데 기어이 축사 밖을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알린 소들이 있다. 2년 전 최장기 장마가 닥쳤을 때 전남 구례에선 양철 지붕에 올라가 울부짖는 소들과 구례 사성암에 오르는 소 무리의 모습이 방송을 탔다. 당시 전국에서 1천 213마리의 소가 죽거나 실종됐는데 구조 대원들에 의해 구조되는 소들의 ‘진귀한 광경’은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살고자 지붕 위에 오른 소 중 ‘90310’ 귀표를 단 15개월령의 소의 경로를 쫓은 <한겨레>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어미 소는 섬진강 범람에 죽음을 면치 못했고, 90310은 지붕 위에 올라 사흘 만에 구조되었다. 90310은 물난리가 났을 때야 비로소 축사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김해로 보내져 도축되었다. 15개월령의 어리고 작았던 90310은 등외판정되어 국밥용으로 kg당 4020원에 팔렸다. 살고자 했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이처럼 비인간 동물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에 의해 인간보다 먼저, 더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숨이 막힐 듯한 폭염 속에서도 돼지는 임신과 출산을 못할까 봐, 달걀은 신선도가 떨어지거나 파손되지는 않을까 우려받는다. 기후재난의 상황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 이들의 몸은 폐기물로 처리되고, 이들의 죽음은 피해액으로 추산된다. 사라진 존재들만큼의 세상이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다.

숲의 사람과 동물까지, 연결된 죽음

ⓒ unsplash

‘가축’ 한 마리의 죽음은 단지 한 생명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연쇄적인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축 사료를 생산하기 위해 드넓은 산림을 밀어버리거나 그 과정에서 산불이 발생할 경우 해당 지역을 서식지로 하는 야생동물의 죽음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례로 브라질의 세라도는 200종 이상의 야생포유류와 식물 1만 1620종이 서식하고 있는 생물다양성이 뛰어난 지역이다. 하지만 최근 세라도 숲이 빠르게 파괴되고 있는데 주된 원인으로 콩과 커피 농업, 축산업이 지목되고 있다. 2020년 7월부터 1년간 서울시 면적의 14배가 넘는 지역이 파괴되었다.

숲속에는 사람도 산다. 아마존에 거주하는 과자자라족 원주민 중 2000~18년 사이 42명이 살해되었는데 2019년 기후비상행진 당시 브라질원주민협회(APIB) 대표 ‘소냐 과자자라’가 참여해 벌목업, 목축업, 광산업 등 숲을 노리는 개발 기업들에 의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며 관심과 연대를 호소하기도 했다. 아마존 열대우림 카리푸나족의 경우 원래 살던 곳의 절반 이상을 벌목업자와 목장주, 광산업자들에게 빼앗겼다.

도축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또한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동물의 숨을 끊는 도축 과정에서는 기계를 쓰더라도 결국 사람 손이 필요한데, 도축장에서도 속도는 생명이라 노동자들은 쉽게 다친다. 피와 기름으로 얼룩진 바닥에 미끄러지거나, 반복된 동작으로 몸에 마비가 오거나, 공정 과정에서 실수로 칼에 찔리거나 베이기도 한다. 2년 전 처음으로 한 도축장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이 산재로 인정되었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 unsplash

이 사회의 위계와 차별, 불평등한 시스템 또한 기후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선진국, 고소득층,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정작 책임이 적은 이들이 그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과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고, 소수만이 이득을 취하며 그로 인한 위험과 부담을 다른 종, 다른 계층, 다른 인종, 다른 국가에 전가해왔다. 기후생태위기는 끊임없이 특정 존재들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한 결과인 것이다.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우리의 식탁을 뒷받침하는 산업 또한 생명을 착취하며 도구화한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작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도살된 축산 동물의 수는 11억 마리에 달한다. 매년 이토록 많은 동물이 죽지만 포유동물의 96%가 인간이거나 인간이 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인, 지구상에 인간보다 가축이 더 많은 현실이다. 사실상 지금의 축산업은 암컷 동물의 임신과 출산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어미는 출산을 하고도 새끼를 돌볼 권리, 새끼는 어미와 함께 있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일례로 우유는 사람의 것이기에 송아지는 어미로부터 분리되거나 도축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동물이 생명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산업으로 누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누가 가장 많은 이득을 취했을까? 위기에 가장 취약한 존재에게도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비로소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과 비인간 존재, 비인간 동물 간 생명의 경중을 나눈 종차별을 그대로 둔 채 인간중심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선 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비인간 동물이 만약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단지 더워 죽지 않을 만큼 보다 넓은 공간을 제공받고, 축사 지붕에 단열재를 대고, 환풍기 등 냉난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죽기 전 인간의 기준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두고 복지라고 칭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기업들이 더 많은 비건 제품을 출시하고, 사람들이 비건 제품을 소비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90310은 방혈, 절단, 박피, 내장 적출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중심적인 기후정의가 아닌, 90310과 모든 생명을 위한 기후정의를 이야기해나가길 바란다.


글. 진채현
녹색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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