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의 집 막내아들을 보며 (1)'에서 이어집니다.

ⓒ 재벌집막내아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편한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시시한 작품을 좋아하진 않는다. 치트키를 썼어도 극적 긴장감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가 사용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주인공의 능력과 비등한 능력을 가진 악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치트키를 쓰고서야 겨우 이길 수 있는 악역이 있다면 긴장감은 언제든 살아날 수 있다. 이 드라마에도 그런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인생 2회차의 할아버지, 진양철 회장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평을 찾아보면 마지막 회에 대한 비난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도 결론적으로 마지막 회에 진양철 회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양철 회장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진양철 회장이 악역이야? 이 드라마가 독특한 지점은 여기부터다. 드라마의 첫 화를 기억하는가? 타지에서 죽음을 당하고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은 자신을 죽인 사람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두 번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시청자들은 이때부터 이 드라마를 복수극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가 진행되면 복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양철의 후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을 보게 된다.
물론 복수는 광범위하다. 자신의 삶을 파괴한 그 재벌 가문 전체가 복수의 대상일 수도 있고, 한국 자본주의 체제 자체일 수도 있다. 진양철 회장을 포함해 그들 모두를 속이고 회사를 점령하는 것도 복수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주인공이 진양철 회장에 너무 진심이다. 초기 설정만 놓고 보면 진양철은 악역 중의 악역이어야 하는데, 주인공조차 진양철의 회사와 사상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한다. 주인공은 진양철을 존경하며, 심지어 후반부에 가서는 한편이 된다. 그럼 이 드라마가 조커처럼 다크 히어로의 탄생을 다루는 작품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면 드라마 끝까지 주인공이 선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뉘앙스다.

ⓒ 재벌집막내아들
객관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이나 다른 재벌 2, 3세나 추구하는 바는 같다. 물론 주인공은 적어도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동은 안 하지 않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후 어떤 사업이 성공할지, 어떤 주식이 오를지를 아는데 뭐하러 대놓고 나쁜 짓을 하겠는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면 정의롭다는 명성까지 가져가는 게 더 이득이다. 주인공의 여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주인공은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성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보통 부자들이 서민들보다 고고할 수 있는 이유가 돈이 많아서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재벌들보다 여유롭고 정의로운 건 그들이 갖지 못한 미래를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 악역이자 매력적인 인물인 진양철 회장과 주인공이 한 몸이 되는 후반부가 되면 이야기는 힘이 떨어진다. 그러면 남은 악역들(진양철 회장의 2세, 3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 단순하다. 드라마 속에는 재벌 2, 3세가 대충 아홉 명쯤 나오는데 한결같이 돈의 노예들이며, 한결같이 매력이 없다. 물론 회사 상속이 걸린 문제니 아무리 재벌이라도 초연하진 않겠지만, 그들이 그렇게까지 돈에 목을 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착한 재벌도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쁨의 방식이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알고 지내는 재벌 2세, 3세가 없어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들은 이 드라마 속 캐릭터보다는 훨씬 매력적일 것이다. 단선적인 인물만큼 상대하기 쉬운 상대도 없다. 그러니 그들은 주인공의 상대가 될 수 없지. 이들이 하는 유일한 역할은 사실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그나마 착한 쪽인 것처럼 포장해주는 것뿐이다.
아무튼 이쯤 되면 드라마 속 복수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진다. 권선징악도 못 한다. 그런 고리타분한 주제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딴 것도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냥 인생 2회차 재벌로 화끈하게 성공하는 것, 그게 이 드라마의 전부다. 이쯤 되면 작품을 엄청나게 깎아내린 것 같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이 드라마에 열광했다. 나 역시도 재밌게 봤다. 시대정신을 관통하지 않으면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이 정도 흥행은 하기 어렵다.
어쩌면 앞의 치트키와 마찬가지로 혹시 재벌이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아닐까. 그래서 한국 드라마에 그렇게 재벌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이번 설에 집안 어르신들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 집안에도 진도준이가 한 명 있었어야 했는데.” 하는 한탄이었다. 가능하든 불가능하든(아마 대부분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 시대 삶의 초상 같은 거지. IMF와 IT버블 붕괴로 서민들(심지어 자신의 원래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는데, 결론이 재벌 되기일 때 마땅히 느껴져야 할 당혹스러움을 대다수 시청자들은 느끼지 않는 듯하다. 결국 “그래서 복수는 언제 하나요?” 하고 묻는 나 같은 사람이 이상한 거다. 재벌이 될 마당에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한가.
지난 추석 때 만난 중학생 5촌 조카의 스마트폰의 배경 화면은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었다. 그게 너무도 신기해서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자신의 워너비란다. 음… 부디 그 친구가 다음 생애에는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나길 빈다. 본인이 아니라 부모님이 다시 태어나야겠지만.
추신. 진짜 재벌들, 특히 삼성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다. 비화 좀 섞어서 유튜브에 코멘터리 하나 올리면 천만 조회 수 가볍게 찍지 않을까? 이재용 회장님 저랑 함께 찍어 보실래요? 콜?… 할 리가 없지.

ⓒ 재벌집막내아들
추천 콘텐츠
플랫폼: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 U+모바일TV
제목: 재벌집 막내아들
포인트
스토리: ★★
시대정신: ★★★
진양철: ★★★★☆
글.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