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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94 에세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 (1)

2023.03.07


"그러나 사실 많은 이별이 갑작스럽게 닥치곤 한다. 이별은 본질적으로 ‘갑자기’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레드와인은 육지 고기와, 화이트와인은 생선과 더 잘 어울리고, 박상민 아저씨는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이별은 느린 옷보다 ‘갑자기 옷’이 훨씬 잘 어울린다.”


ⓒ unsplash

얼마 전 ‘밀리의 서재’에서 위화의 장편소설 <원청> 요약본을 낭독했다. 이 책의 표지에 있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끝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문장 속이 아닌 실제 세상에서는 모든 게 끝나고 만다. 나도 언젠가는 성우로서 은퇴라는 단어와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렇듯 100%의 확률로 죽을 것이다. 끝나지 않는 것은 없다.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언어의 정원> 녹음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이별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이별이 갑작스럽게 닥치곤 한다. 이별은 본질적으로 ‘갑자기’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레드와인은 육지 고기와, 화이트와인은 생선과 더 잘 어울리고, 박상민 아저씨는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이별은 느린 옷보다 ‘갑자기 옷’이 훨씬 잘 어울린다.

그것은 우리의 시작이 갑작스러웠던 데에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부모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한때 아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가 아무리 계획적으로 출산을 하더라도 아기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신생아실에 쪼르르 누워 있는 아기들이 만약 텔레파시로 수다를 떨 수 있다면 아마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

ⓒ unsplash

너는 누구야?
그러는 너는?
그러게 나는 누구지? 갑자기 눈을 떠보니 여기야.”
너도? , 나도 갑자기 태어났는데?
우리는 모두! 갑자기! 이런 봉변을 당했구나!?
(모두 함께) 으아아아앙!!!

그래서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생략되고, 끝부분의 ‘으아앙’만 우리 귀에 전해지는지도.

2020년 3월에 여기에 나의 글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해의 이맘때, 이전에 내가 작업했던 어떤 작품의 인터뷰를 담당했던 기자님께서 별안간 본인이 편집장을 맡게 된 잡지에 글을 연재해보지 않겠냐며 연락을 주셨다. 첫아기의 탄생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빠가 되면 그 노릇을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기 탄생뿐만 아니라 성우로 일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도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우 심규혁에게 끼어 있던 거품이 다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나는 항상 최악을 생각해보는 인간이라서 그렇다. 진짜 가장 큰 걱정은 이제 나의 시간과 꿈은 끝이 아닐까 하는 것. 아마 부모가 되길 꺼리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부모가 되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만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래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블로그에 매일 한 편씩 짤막한 단상 글을 올리는 시도를 했다가 하마터면 글쓰기 자체를 증오하게 될 뻔하기도 했고,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던 유튜브 채널에 일주일에 한 번씩 되는 대로 영상을 만들어 올려보기도 하고 라이브 방송을 켜보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나의 존재감 상실을 막기 위해 그나마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에세이 쓰기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온라인 클래스 수업을 신청했다. 연재 기획서 초안을 만드는 것이 그 수업의 첫 과제였다. 편집장님의 연락을 받은 것은 그 수업이 끝난 직후였고, 나는 과제로 만들어놓은 기획서 초안을 그대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됐다. 아니, 태어났다. 갑자기.

이 글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 (2)'로 이어집니다.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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