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NTV
나는 매일 힘겹게 헤쳐가는 일상을 능숙하게 해나가는 듯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인생 N회 차’라고 표현한다. 한 번 살아봤으니까 그다음 삶에서는 더 잘하겠지 하는 기대를 전제로 시작되는 장르가 바로 회귀물이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가. 보통 그런 기회는 아무나 얻을 수 없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 복수하고 싶거나 세계를 구할 대단한 명분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가끔은 그저 열심히 평범하게 살아도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일본 NTV, 왓챠 시청 가능)의 시작이다.
<브러쉬 업 라이프>는 제목대로 삶을 brush up, ‘다시 시작하며 더 낫게 만드는’ 회귀라는 설정이지만, 다른 회귀물에 비하면 그다지 거창하지 않은 일상성이 특징이다. 고향의 시청에서 근무하는 아사미(안도 사쿠라)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간다. 사람 좋은 아버지와 살뜰한 어머니, 사이좋은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도 원만하고, 소꿉친구인 미호(기나미 하루카)와 나츠키(가호)와 함께 단골 동네 레스토랑에서 한 달에 두어 번 함께 저녁을 먹는 것도 소소한 기쁨이다. 하지만 이런 일상이 어느 날 예고 없이 사라진다. 서른세 살, 아사미는 평상시와 다름없던 밤에 순식간에 죽고 만다. 아사미가 가게 된 곳은 병원의 접수대처럼 온통 새하얀 공간. 데스크에 앉아 있는 안경 낀 사무원(바카리즈무)은 담담하게 접수한 후, 아사미에게 이번 생은 끝났으며 왼쪽 문으로 가면 새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사미가 내세에 살게 될 삶은 큰개미핥기의 삶. 덕이 모자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저히 개미핥기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사미는 시청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사정하고, 그러자 예의 사무원은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옵션이 있다고 소개한다. 오른쪽 문으로 나가 다시 태어난 아사미, 이제 덕을 쌓기 위한 인생 2회 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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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볼 때는 평범한 회귀물 같다. 덕을 쌓으려는 아사미는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 아빠의 불륜을 막으려 애쓰고, 중학교 다닐 때 싫어했지만 나중에 억울하게 지하철 치한이라는 누명을 쓴 선생님을 구하려 한다. 세상을 바꾸거나 하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또, 회귀했다고 해서 인생이 마냥 쉬운 것도 아니다. 어떤 사건은 예측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모두 내 힘으로 해나가야 한다. 로또 번호를 외울 수도 없고,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 수도 없다.
드라마의 분위기도 시종일관 잔잔하다. <브러쉬 업 라이프>의 초반을 보면, 보통 드라마보다 훨씬 더 대사가 많다고 느껴진다. 인물들은 끝없이 자기들만 아는 농담을 주고받고, 그런 대화가 드라마의 사건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어떤 대사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인생 N회 차가 반복되면서, 이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대사에서 드러나는 복선이 있고 삶의 사건들은 새롭게 해석되고 구성된다. 가령, 아사미의 3회 차 인생의 드라마 회의에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을 다시 살려면 불륜을 막는 것만으로는 약하지 않나? 절친한 친구의 목숨 정도는 구해야 하지 않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구세주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에 이 대사는 평범한 삶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코믹한 대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브러쉬 업 라이프>는 나중에 가면 보여준다. 불륜을 막음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까지 본 어떤 회귀물의 대본보다도 치밀하고 동시에 따뜻하다.
이 글은 '<브러쉬 업 라이프> (2): 인생 5회 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서 이어집니다.
- 소개
박현주
작가, 드라마 칼럼니스트.
글. 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