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상단으로이동
신간 · 과월호 홈 / 매거진 / 신간 · 과월호
링크복사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글자확대
글자축소

No.298 에세이

여행 경험은 최고의 가치가 아니야 (1)

2023.06.02

“여행 좋아하세요?”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 대화 소재가 떨어져서, 더 이상 MBTI의 E나 I 가지고도 늘려갈 스몰토크가 없을 때 무난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이 여행이다. 삼면이 바다여서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대륙으로 갈 수 없는 민족이라 그런가, 팬데믹이 조금 풀리자마자 사람으로 가득 찬 공항 사진만 보아도 한국인이 여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여행 좋아하느냐’는 취향을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향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낯선 곳에 가면 스트레스를 받고, 돌발 사건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잠시의 틈만 나도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던 쪽이다. 무리해서 비행기 표와 숙박비를 카드로 결제하고 그 빚을 갚느라 6개월을 허덕이기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삶에서 ‘여행’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니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좁디좁은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깨달았다. 비좁은 공간에 어깨를 웅크리고 궁둥이를 뗄 수도 없도록 고문당하며 14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를 150만 원이나 주고 사다니! 그리고 왜 공항에는 출국 세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이며, ‘어텐션 플리즈 쏘오리~’라며 시도 때도 없이 출발 시간을 어기며 남의 시간을 함부로 여기는 건 또 어떻고. 몇 번의 가방 검사와 신체검사까지 받고 기나긴 대기 시간을 거쳐 딱딱한 공항 의자에 앉아 복잡한 탑승 시간표를 알아서 챙겨 보는 것도 고객의 몫이다. 교통비 중에서도 가장 비싼 돈을 결제해놓고 시간에 끌려다녀야 하는 이 과정을 나는 왜 그토록 좋아했던 것인가.

자랑하기 위한 여행
여기서부터는 시간과 돈을 방탕하게 낭비하고, ‘난 여행을 좋아하니까.’라며 정신 승리했던 저 자신에 대한 분노이지, 여행 좋아하는 분들을 폄훼하는 글이 아님을 밝혀둡니다.


나는 왜 여행을 많은 돈을 갖다 바칠 만한, 황홀한 경험이라 여겼을까. ‘나 거기 가봤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지.’ 혹은 ‘가봤더니 별거 없더라.’ 그 한마디 하고 싶어서? 낯선 곳에 나를 데려다놓아야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어서? 여행이야말로 바쁜 일상에 찌든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휴식이라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으쓱대고 싶어서? 여행 다니느라 목돈을 탕진하고, 내세울 거라곤 ‘잦은 해외여행 경험’밖에 없는 나이 든 사람이 되고 나면 ‘경험’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취향과 경험이 인생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게 과연 현명한 가치관인가. 모은 돈이 없어 늘 불안한 대신 그까짓 경험이 많다는 게. 더구나 그 알량한 경험이란 겨우 이런 거다. 방송이나 책 표지에 나오는 유명 관광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평생 다시 마주칠 일도 없는 외국인과 더듬더듬 말을 섞어 인스타그램 주소를 주고받고는 ‘외국 와서 친구 사귄 나’에 도취되는 것.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이국적인 경치에서 느낀 찰나의 경이로움은 지금 나에게 어떤 효용 가치가 있는가. ‘여행해봤다는 경험의 가치’를 왜 세상은 그토록 대단한 것인 양 치켜세웠던 것일까.

더구나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전까지의 전 과정은, 사람을 탈수기에 탈탈 돌려 짠 것처럼 진빠지게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공항을 빠져나가 낯선 언어를 들으며 구글지도에 코를 박고, 미로 위 화살표를 따라 숙소에 도착해 ‘꺄아, 너무 좋다. 바로 이게 여행이지! 오길 잘했다.’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은 그 침대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지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가 너무 고파야 밥이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 서른다섯 이전의 나는 여행을 좋아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코로나19 봉쇄가 풀리기 전 유나이티드 항공의 비행기 표(인천 출발–샌프란시스코 경유–LA 도착)를 예약해두었던 나는 출발 직전까지도 ‘꺾이지 않는 마음’처럼 쑥쑥 오르던 환율을 바라보다 비행기에 올랐다.

장거리 해외여행을 한 지 오래됐던지라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육신을 간신히 구기고 90도로 앉아 있는 고통을 선사하되 항공사에 항의는 못 할 정도의, 인간이 딱 죽지 않을 만큼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은 몇 센티인가를 고학력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 고안한 듯한 이코노미석에 열 시간 이상 앉아 있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코로나19 기간 동안 내 몸은 급속 노화 구간에 들어섰다. 더는 책 속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유나이티드 항공의 스크린 서비스에 한국인을 위한 볼 거리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 글은 '여행 경험은 최고의 가치가 아니야 (2)'에서 이어집니다.

  • 소개

김송희
작가,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를 썼다. 인스타그램@cheesedals


글 | 사진. 김송희


1 2 3 4 5 6 7 8 

다른 매거진

No.330

2024.12.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No.330

2030.03.02 발매


올해의 나만의 000

No.329

2024.11.04 발매


요리라는 영역, 맛이라는 전개

《빅이슈》 329호 요리라는 영역, 맛이라는 전게

No.328B

2027.05.02 발매


사주 보는 사람들, 셀프 캐릭터 해석의 시대

《빅이슈》 328호 사주 보는 사람들, 셀프 캐릭터 해석의 시대

< 이전 다음 >
빅이슈의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