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개인적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로 바꾸는 에세이 (1)'에서 이어집니다.
최선호 일러스트
자기 연민이 다정함으로 옮겨갈 때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화의 시기에는 그에 집중하면서 자기 트라우마를 확인해보는 작업을 하는 게 좋습니다. 어떨 때 우울하거나 분노를 느끼거나 슬퍼지는지 기록해두고 그 내용을 인과관계로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면 전보다 객관적인 시각이 생겨납니다. 글로 쓴다고 해서 현실에서 해결되는 건 없다 해도 밖으로 꺼내놓았다는 자체로 마음이 한결 정화됩니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는 아직 쓸 준비가 안 되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다독이는 연습이 됩니다. 작년에는 쓸 수 없던 이야기를 올해엔 할 수 있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지금 갇혀 있는 이야기에서도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기거든요.
그다음 단계로, ‘나는 이럴 때 이렇게 힘들어요.’라는 자기 연민의 일기가 ‘혹시 당신도 이럴 때 이렇게 힘들지 않나요?’ 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다정함으로 옮겨갈 때 그 이야기는 비로소 보편적 에세이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타인과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는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어요. 일기의 세계에서 자기를 탐구하다 이제는 충분하다 싶어질 때 에세이의 세계를 겪어보시길 권합니다.
에세이 쓰기 워크숍에서 저는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엄마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글을 써 온 적이 있습니다. 그의 엄마는 딸이 혼자 사는 집에 예고 없이 들러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두거나 대청소를 하고 갑니다. 최근에는 결혼정보회사에 비용을 지불하고 가입해두었으니 주말마다 남자를 만나보라고 성화입니다. 그런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나는데,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해서 답답하단 내용이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서 좋았지만 자기 마음이 복잡하다는 데서만 끝나버려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훌륭한 글감이지만 거기서만 끝나버리면 독자들은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여지나 새로운 시각을 선물 받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 그칠 게 아니라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잠수부처럼 파헤쳐 내려가면 다른 사람과 함께 감상하기 좋은 무언가를 채취해 올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글 속의 모녀 관계를 특수하다고 느끼지 않고 자기의 상황과도 겹쳐볼 수 있다면 더욱 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단순히 엄마의 행동에 싫은 감정만 드는 게 아니라 뒤죽박죽된 마음으로 괴로운 상황이네요.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지만 답답하고 죄책감이 드는 거죠. 그 분위기를 좀 더 들여다보면 ‘엄마는 내가 원치 않았던 걸 주면서 자신의 진심만 강요하고 감사를 강요하기 때문에’ 힘든 걸로 보여요. 그처럼 우리가 살다 보면 원치 않은 선물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특히 나를 좋아한다는 이가 그런 행동을 계속하면 곤란해지죠. 어렵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상대가 자기 순수한 의도만을 강요하면 그때부터는 그걸 받아주지 못하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괴로워지는데 그러고 보면 선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닌 듯해요. 그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선물에도 처치 곤란인 게 있다는 이야기를 궁극적으로 해보는 건 어떨까요? 또는 사랑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관계들에 대해 주제를 살짝 옮기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 같아요.”
이처럼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들이 감정을 이입할 만한 이야기로 확대하면 독자에게 전과 다른 새 관점을 선물하거나, 깊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충분히 공감하게 한 뒤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보면 좋을지’ 독자들이 멈춰서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기만의 인장으로 차별화되는 힘이 되기도 하지요.
작가(作家). 한자를 그대로 보면 집을 짓는단 뜻인데 일상의 에피소드는 재료일 뿐 그 자체로는 집이 되지 않습니다. 에피소드에 더해서 감정뿐 아니라 자기만의 해석이 곁들여져야 합니다. 특별한 경험을 해서 특별한 에세이를 쓰는 게 아니고 평범한 경험에서 특별한 결론을 뽑아내는 것이 작가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제가 가진 평범함을 콤플렉스로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범함도, 아니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점도 많다는 걸 체감했으니까요. 에세이를 써서 작가가 되고 싶다면 결말을 다시 한번 써보세요. 일기에서 에세이로 주제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때, 저자가 유명하지 않고 독특한 경험이 없고 독보적인 문체가 없어도 그 글은 책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 소개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썼습니다. 유튜브 채널 <정문정답>을 진행합니다. [email protected]
최산호
instagram.com/g.aenari
글. 정문정 | 그림. 최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