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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0 에세이

체제를 훔치는 방법 (1)

2023.06.04

ⓒ digital inkjet pigment print

이 글을 쓰는 시점은 5월이다. 5월의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상흔이자 지속되는 기억의 현장이다. 특히 올해는 전두환 씨의 손자가 광주를 찾아 ‘브란트의 무릎 꿇기(Brandt Kniefall)’에 비견되는, 전격적이고 공개적인 참회를 하기도 했다. 정치 진영과 감정을 떠나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방대한 축이 끊임없이 인간사를 주제로 삼아 응시하는 것도 시공간 안에 이런 변곡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에는 ‘개념 미술’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이를 두고 다양한 정의와 풀이가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를 ‘현상을 알아가는 동시에 놓아주는 시도의 미술’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따라서 때로는 외연적으론 일반적인 ‘풍경화’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는 개념 미술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개념 미술은 대부분 약간의 장치를 동원해 개념 미술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이 꼭 정석이고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생활 가이드로서 예술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이 정도는 언급해야겠다 싶다. 그리고 이것은 더더욱 개인적인 취향인데, 요즘은 개념 미술 작가가 ‘개념’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그 내용을 이야기할 때 어쩐지 더 끌린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홍준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딱히 자신을 개념 미술 작가라 소개하지는 않지만 묵직한 작품들이 품은 개념이 참 궁금했던, 한두 번 마주치고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SNS에 올린 이미지와 텍스트로 파악하게 되던 작가. 비판적 말과 삶을 사랑하는 학자 같은 느낌,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두움도 느껴지던 작가. 산업재해로 대기업을 그만두고 아티스트가 된 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미술계에 드문 비전공자. 여러 연작 중 ‘이미지를 훔치는 방법’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간 그를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 3월의 어느 날 문득 요즘 어디 계시냐고 DM을 보내 물었더니, 현재 입주 작가로 있는 춘천예술촌과 그룹전이 열리는 광주, 집이 있는 서울을 오간다고 했다. 언젠가 나를 개인전에 초대한 적이 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못 갔던 아쉬움도 있었기에 나도 더 말하기가 편했다. 이번에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두 번을 만났다. 한 번은 광주에서, 한 번은 서울에서. 사실 이런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쓰는 이유가 하나 있다. 물론 일정 부분 나의 직업적 특성이나 이로 인한 혜택이고, 작가의 성별을 비롯한 신상 정보나 성격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나 컬렉터들도 작가가 대화나 SNS를 통한 소통을 어느 정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전시 때 직접 만나 밀도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슬기로운 문화생활’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싶다.

ⓒ Digital Being – Passport #01

홍준호는 현재 6월 30일까지, 202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4개월간 입주 작가로 있었던 호랑가시나무 창작소(광주시 남구 제중로 47번길 22)에서 그룹전 <불불불불(FFFFIRE)>(기획 총괄 박계연)의 참여 작가 열 명 중 한 명으로 광주를 수시로 오가고 있다. 이 전시를 직접 보고 온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1박 2일 일정으로 같은 시기에 열리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와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기획 총괄 이숙경, 7월 9일까지)와 함께 관람하기를 강권한다. 때마침 광주비엔날레의 용봉동 본 전시관 외 여러 파빌리온 중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도 있어 <불불불불> 전시와 함께 보는 재미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불불불불> 전시는 의도적으로 물을 주제로 한 이번 비엔날레와 대칭을 이루는 불을 주제로 시기를 맞춰 여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은 기획자로서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점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광고계의 격언처럼 홍보에 실패한 전시는 그 자체로 실패일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소구 전략에 전시 내용이 뒤처져서는 안 되는데, 이 전시는 이 부분 역시 충실하고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 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우수 전시 지원으로 개최되고 있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이 밖에 해양 심층수 브랜드의 지원을 받거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는 조건으로 전시 로고를 새긴 라이터를 증정하는 등 다양한 이벤트를 병행하고, 작가들이 2인조로 스케줄을 짜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전시 기간 내내 매일 지킴이이자 도슨트(게다가 대부분 영어로도 가능)로 활약하고, 5차에 걸쳐 ‘작가 주도 커뮤니티 워크숍’까지 개최한다는 사실 또한 이 전시의 진정성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체제를 훔치는 방법 (2)'에서 이어집니다.

  • 소개

배민영
아트 저널리스트이자 누벨바그 아트에이전시 대표. 기획과 평론을 한다.


글 | 사진제공. 배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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