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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3 에세이

이금희의 환대, 유시민의 선명, 김영하의 반전 (2)

2023.07.20

이 글은 '이금희의 환대, 유시민의 선명, 김영하의 반전 (1)'에서 이어집니다.

ⓒ 그림 최산호

관심도를 최대로 끌어올린 뒤 조곤조곤하게

반면 김영하 작가의 경우엔 감탄의 포인트가 달랐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부터 그의 소설과 산문을 읽어왔습니다. 특히 <검은 꽃>을 읽으며 펑펑 울던 제주도에서의 한낮이 선명합니다. 언젠가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을 하는 걸 듣고 어떻게 글도 잘 쓰면서 말을 잘하나 신기했습니다.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저 역시도 강의를 하러 가서 독자에게 “작가님인데 말을 잘하시네요.” 같은 말을 종종 듣는 걸 보면 글 쓰는 작가가 말을 잘하는 모습은 흔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하기는 왜 매력적일까요? 왜 그의 화법은 위트가 있고 신선할까요?

김영하 작가는 반전 스토리텔링의 대가입니다. 일부러 삐딱하게 말하는 방식을 선호하며 질문을 받을 때면 사람들이 하고 있을 법한 예측과 반대로 답한 뒤 본론을 시작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뻔하다’는 말을 듣는 걸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예컨대 김영하 작가는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통영과 경주에서 피자를 시켜 먹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피자를 먹느냐.”는 패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죠. “우리는 서울에는 보편의 것이 있고 지역에는 특수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 않거든요. 지방도 계속 바뀌고 있고 거기서도 보편적인 것을 찾을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이 여행지에 가서 토속 음식을 찾을 때 반대로 행동하는 김영하 작가의 모습처럼 그의 말도 비슷한 성향을 띱니다. 그의 언어에는 평범한 시선을 전복시켜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예술가의 중요한 작업 요건 중 하나인 ‘다르게 보기’가 그에게는 생활인 셈이죠.

“책이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면 큰일나요” 같은 말도 대표적이죠.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는 "저는 MBTI를 믿지 않아요. 그건 내가 생각하는 나일 뿐이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내가 다를 때 재밌는 것들이 많이 생겨요.”라고 답하기도 하고, “글쓰기는 전문적인 영역 아닌가요?”라는 질문에는 “글쓰기는요, 전문적인 작가들일수록 더 어려워해요.”라고 서두를 꺼냅니다. 상대의 질문을 받으면 그 말을 뒤집어 의외성에서 시작하는 말하기를 즐겨 하는데 이 과정에는 흥미를 위한 과장이 맛깔스럽게 섞입니다. “항상 매사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평소에 에너지를 좀 비축해놓는 게 좋죠.”라고도 할 수 있는, 그랬다가는 뻔하디뻔해지는 이 말이 그를 거치면 “최선을 다하면 큰일나요.”로 바뀌는 거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나, 들어보려는 이들의 관심도를 최대한 끌어올린 후 김영하 작가는 조곤조곤 부연합니다. 말에도 소설처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가미하는 겁니다.

또 다른 어록을 보죠. 대관람차에 굳이 낙서를 남기는 심리에 대해서 그는 말합니다. “사랑도 불안정하고 자아도 불안정하잖아요. 안정되면 그걸 왜 새기겠어요. 바위처럼 사랑이 당당하면. 불안정하니까 안정돼 보이는 곳에 새기는 거죠.” 왕릉에 빽빽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소나무가 이 왕릉을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능이 아니었다면 소나무를 그냥 놔뒀겠어요? 사람들이 뭐 다 개발하고 그랬겠지. 무려 2000년 전에 죽은 왕이 이 소나무들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반전과 강조의 힘이 청중의 집중력을 고도로 모읍니다.

말하기도 닮을 수 있다

유시민 작가처럼 지적인 말하기에는 방대한 독서량이 필요하고, 김영하 작가처럼 반전의 말하기에는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비법을 안다 해도 따라 하기는 힘이 들죠. 그건 오랫동안 수련을 거쳐야 하는 고수의 내공이니까요. 다만 이 같은 큰바위얼굴이 있으면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싶은지를 알게 되고 지금 가장 필요한 연습법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일상을 채우는 말들 중에서는 닮고 싶은 말을 찾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롤모델의 적극적인 수집이 필요한 거죠.

유시민 작가를 선망하던 시기에는 논리적인 말하기를 하고 싶었고 김영하 작가를 부러워하던 시기에는 흥미롭게 말하고 싶었고 이금희 아나운서의 영상을 자주 보는 요즘은 힘을 좀 빼고 편안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시기마다 닮고픈 선생의 책을 읽을 뿐 아니라 영상을 자주 틀어놓는 건 특히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외국어를 공부할 때 드라마를 틀어놓고 자주 들으면 주인공 특유의 어투와 리듬이 튀어나올 때가 있듯이 모국어도 그렇거든요. 간절할수록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닮게 될 겁니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은 인간이 AI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치를 정리해 2023년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특성이 적혀 있었습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개인의 목소리, 프레젠테이션하는 기술, 어린아이 같은 창의력, 특이한 세계관, 공감….’ 개성 있거나 창조적이거나 독특한 세계관이 느껴지거나 공감하는 말하기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술로 여겨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고유의 목소리를 전달해서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란 인간적인 가치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핵심 자질이니까요. 개성 있는 말하기야말로 대체하기 힘든 인간다움 그 자체이니까요.

소개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썼습니다. 유튜브 채널 <정문정답>을 진행합니다. [email protected]

최산호
instagram.com/g.aenari


글. 정문정 | 그림. 최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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