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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7 에세이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시작된 이상한 꿈 (1)

2023.09.27

일상의 관성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전혀 새로운 감각이 작동했던 지난 수요일도 그런 날이었다.


ⓒ 이상한꿈, 정해진 두 지점 사이의 여정, 가변크기, 2023

날짜: 2023년 8월 30일 수요일
장소: 경복궁역 3번 출구
시간: 14:40

예약해주신 정각이 되면 위 장소에서 ‘흰옷을 입고 주황색 이어플러그를 낀 분’을 찾아주세요.

ⓒ 박관우 개인전 <이상한 꿈 / 미제사건> 전시전경

전시 예약 확인 문자라고 하기에는 몹시 수상했다. 10분 단위로 예약을 받는 것도 그렇고 지하철역 출구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을 찾으라는 것도 영 미심쩍었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묘한 전시. 이 글은 서울 어딘가에서 경험한 이상한 꿈이자, 분명히 실재했지만 당신과 공유할 수 없는 어떤 감각들에 관한 이야기다.

박관우 작가의 개인전 <이상한 꿈 / 미제사건>을 예약한 건 열흘 전 일이었다. ‘액자식 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소개와 전시장 건물 공간 및 주변 일대를 작품의 무대로 설정한다는 것이 마음을 끌었다. 오랫동안 행보를 지켜봤던 서촌 복합문화공간 더레퍼런스에서 열리는 전시니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 기존 미술 전시와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이상한 꿈 / 미제사건>의 예측 불가능함은 호기심과 함께 묘한 불편감을 동반했다.

‘흰옷을 입고 주황색 이어플러그를 낀 분을 찾아주세요’. 사전 예약을 한 관람객에 한해 1:1로 퍼포먼스를 진행한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접근일 줄이야. 흰옷을 입은 사람은 작가일까? 10분 단위로 7일 동안 작가가 움직이기는 무리겠지. 아니면 전시 도슨트 같은 걸까? 그 사람과 함께 지하철역 앞에서 무엇을 한다는 걸까. 3분 이상 늦게 도착하면 참여가 어렵다는 예의 바른 경고 문장까지. 확인할 길 없는 의문들을 잔뜩 안고 경복궁 3번 출구로 향했다. 아까만 해도 굵은 빗방울을 쏟아내던 하늘이 잔뜩 물기만 머금은 채 멈춰 있었다.

ⓒ 이상한꿈, 정해진 두 지점 사이의 여정, 가변크기, 2023

이상한 꿈의 동행자
10분 정도 일찍 접선 장소에 도착했다. 평일 오후임에도 역 앞은 꽤 분주했다. 바쁘게 오가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짝 뒤로 빠져나와 3번 출구가 보이는 구석에 섰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없는지 빠르게 스캔하던 그 순간, 위아래 그야말로 새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느릿느릿 걸어오더니 3번 출구 앞에 가만히 섰다. 바쁘게 오가는 군중 사이에서 혼자만 멈춰 있는 사람. 어깨를 덮는 곱슬머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인가? 그의 귀에서 언뜻 주황색 이어플러그가 보였다.

“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알 길이 없던 나는 애매모호한 관형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잠깐 나와 눈을 맞추더니 아무 말 없이 보라색 이어플러그를 내밀었다. 이걸 끼라는 건가? 귀에 끼우는 시늉을 했더니(왜 나까지 말을 안 하게 되는 건지!) 그저 온화한 미소만 지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함과 적막함을 배경 삼아 나도 그처럼 이어플러그를 귀에 꽂았다.

즉각적인 모드 전환. 이어플러그를 끼자 꽉 차 있던 거리의 소음이 일순간 낮은 데시벨로 결을 바꾸었다. 외부 소음에 묻혀 있던 가느다란 소리, 내 숨소리, 옆 사람 옷이 사각거리는 소리들이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눈앞의 장면들도 채도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감각 하나가 걷어지면 다른 감각들이 그만큼 더 활성화되는 걸까.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아까 서 있던 거기가 맞나 싶었다. 조그만 스펀지 조각을 귀에 끼웠을 뿐인데 순식간에 내가 있는 좌푯값들이 다르게 수정된 느낌. 고요해진 풍경 안에 삐죽 그의 손이 들어왔다. ‘자 이제 여행을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듯 나에게 내민 손.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수없이 걸었던 길을 천천히, 낯설게 걸었다. 눈을 뜬 채 꾸는 이상한 꿈. 전시의 시작이었다

이 글은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시작된 이상한 꿈 (2)'에서 이어집니다.

소개

김선미
서울 북아현동에서 기획 및 디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신문, <샘터>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글. 김선미 | 사진. 스튜디오 박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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